축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한국 국가대표 팀이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을 치르는 내내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을 것이다. 거스 히딩크. ‘월드 클래스’와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이는 팀과 시합하면서도 우리 선수들은 잔뜩 몸이 굳어 패스도 슛도 제대로 못하고 허둥댔다. 축구 팬들은 새삼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세계의 어떤 강호와 맞붙어도 주눅 들지 않도록 한국 대표팀을 조련했던 그를 위대하다고 여겼음직하다. 히딩크 감독에게 꽂혀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게 된 나라가 그의 조국 네덜란드이다. 한국 사람들이 히딩크에게 열광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히딩크는 축구 이외의 것이 축구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협회의 권위, 지연, 학연, 그리고 나이까지. 한국인에게 히딩크, 곧 네덜란드는 실질을 숭상하는 스마트한 국가로 통하게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네덜란드인은 두려움을 모르는 타고난 개척자이다. 이 나라의 정치가나 홍보 전문가는 자기 모국을 ‘gids'land’, 즉 모범 국가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이들은 과거 스페인이나 영국보다도 먼저 대양으로 나아가, 나라 문을 닫아걸었던 조선을 비롯한 전 세계에 존재를 알린 전력이 있다. 제국 간의 전쟁에서 패배해 해외 식민지와 국토의 태반을 잃은 뒤에는 안으로 눈을 돌려 간척에 힘썼다. 끈질긴 투쟁을 통해 바닷물을 몰아내고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국토의 27%에 달하는 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전 세계인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글로벌 금융 질서의 토대를 닦은 것도 네덜란드 출신 은행가들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갈 때는 전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법이 아니던가. 연고주의가 발붙일 수 없는 문화가 뿌리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약과 섹스에 관한 느슨한 규제, 안락사 허용과 같은 급진적 사회제도도 이 개척정신이 작동한 결과이다.

여기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 미국 월가를 횡행하는 태반의 사기 수법도 네덜란드인 작품이다. 독버섯 같은 조세회피처를 만드는 데도 네덜란드인은 단단히 한몫을 했다. 2008년 18조 달러가 네덜란드 역외 법인들을 거쳐 갔는데 이는 네덜란드 GDP의 20배에 달하는 규모이다. 이 법인들은 구린 돈을 스위스나 영국 등 종착지로 보내는 도관 구실을 한다. 이런 돈의 태반은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독재자, 부패 관료, 마약 카르텔 같은 범죄 조직에서 나온다. 그곳 아이들과 빈민의 식량과 옷이 되어야 마땅한 돈이다. 악명 높은 조세회피처인 네덜란드령 안틸레스는 네덜란드가 노예무역을 하던 제국의 일당이었음을 상기하게 한다.

네덜란드는 인종차별에서도 개척자적 면모를 보였다. 역사상 가장 악랄한 흑인 탄압 체제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만든 것은 보어인, 즉 아프리카너라고 불리는 네덜란드계와 독일계였다. 외부에서는 네덜란드를 ‘관용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네덜란드는 아직 인종차별이라는 오래된 악습을 청산하지 못했다. 얼마 전 저명한 네덜란드 여성(거의가 백인이었다) 100여 명이 서명한 성명에 따르면 네덜란드에서 흑인과 유색인종 등 소수자들이 매일 눈물을 흘린다. 유력 매체는 백인우월주의자에게 장악됐으며 그 매체들은 언론 자유란 이름 뒤에서 유색인종과 여성, 그리고 그들을 옹호하는 이들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지난 3월 총선에서 이런 극우 성향을 대변하는 자유당이 원내 제2당으로 도약했다. 어느 나라에나 감추고 싶은 치부는 있기 마련이다.

네덜란드는 지금 또 다른 실험을 진행 중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해온 그 어떤 실험보다 중요할지 모른다. 일찍이 자연과 싸워 극복해온 경험을 풍부하게 쌓은 네덜란드인들은 기후변화로 위기를 맞은 전 세계 해안 도시로부터 러브콜을 받는다. 미국의 마이애미와 샌프란시스코,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 이르기까지 바다 수위가 올라가 수몰 위기에 처한 해안을 보호하기 위한 건설 수주를 싹쓸이하고 있다. 이미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갈가리 찢겨나간 미국 뉴올리언스의 리디자인 작업에 착수했다. 네덜란드의 450개가 넘는 물 관리 업체는 네덜란드 국민총생산의 4%를 감당할 정도로 성장했다. 미국 자동차 산업과 비등비등한 규모다. 네덜란드의 기술자들은 로테르담을 물의 무자비한 공격이라는 변화에 적응해 살아남은 쇼케이스라고 광고한다. 네덜란드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 행성을 구할 수 있을까.

2050년이면 지구 인구는 지금의 75억명에서 100억명으로 불어나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 40년 동안 지난 8000년간 모든 농부가 수확한 것보다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 기후변화는 농부들을 더욱 힘들게 할 것이다.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10억명 이상이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대재앙을 맞을 수 있다. 화석연료에서 추출한 화학 살충제와 인공 비료를 살포해가며 대규모로 단일 작목을 경작하던 방식은 한계를 맞았다. 혁신적인 해결책은 없는 걸까.

ⓒ한성원 그림

이 문제에 대한 견해는 대체로 두 갈래다. 친환경 편에 선 이들은 인간이 절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처럼 시장 논리에 따라 대량생산하고 유통하는 방식을 버려야 한다. 예전처럼 밭에 많은 종류의 작물을 함께 심고 될 수 있으면 필요한 먹을거리를 자기 지역에서 조달하는 쪽으로 전환해야 한다. 가축은 놓아먹이고 육식도 줄여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설립한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 같은 곳도 아프리카에서 수백만 년 동안 사람들을 먹여 살렸던 전통 농법을 살려내려 애쓰고 있다. 


반면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한다는 친환경 농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는 이들도 많다. 그 대표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남동쪽 80㎞ 지점에 위치한 ‘바헤닝언 대학과 연구소(Wageningen University and Research Centre·WUR)’에 집결한 농업 전문 두뇌집단이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떠올리게 하는 일명 푸드밸리. 세계에서 가장 큰 농업 연구센터이다. 이들은 이른바 과학영농, 대규모 단작농 방식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단점을 지우고 장점을 키우면 얼마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그린하우스’에 최소한의 물과 자원, 화학약품, 비료를 투입해 노지보다 몇 배나 더 높은 생산성을 올리기 위한 방법을 연구해왔다. 신나게 키워서 배터지게 먹자는 주의다.

그 결과가 지금의 네덜란드 농업 현황인데, 생산 수치가 놀랍다. 국토는 좁고 인구밀도는 높은데 이렇다 할 자원이라곤 없는 네덜란드가 세계에서 두 번째 농산물 수출국으로 발돋움했다. 땅덩어리가 270배나 큰 미국만 아직 제치지 못했다. 토마토·양파·감자 수출은 세계 1위이다.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채소 씨앗의 3분의 1이 네덜란드산이다. 농민은 주요 작물의 물 의존도를 90%까지 줄였다. 축산과 낙농업자는 항생제 사용을 60% 줄였다.

네덜란드의 농가에 가면 마치 화성의 개척지 온실에 와 있는 것만 같다. 천장에서는 작물의 생장을 촉진하기 위한 LED 전등이 24시간 켜져 있다. 지상에서는 무인 트랙터가 돌아가고 있고, 공중에서는 드론이 날아다니며 작물과 토양의 상태를 면밀히 체크한다. 그 모든 광경을 농부가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고 있다.

인간이 개입하고 통제하는 농축산의 한계가 다시 드러난다면

최첨단 토마토 농장은 거의 완전한 자급형 체제이다. 관개용수는 빗물이면 충분하다. 놀랍게도 흙은 보이지 않는다. 토마토 나무는 현무암과 백색 석회암에서 추출한 섬유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물은 흙에서 기를 때의 4분의 1이면 족하다. 6m가 넘는 줄기에는 15종류에 달하는 토마토가 매달려 있다. 소비자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다. 온도는 1년 내내 토마토를 기르도록 최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네덜란드 국토 절반가량의 지하에서 절절 끓는 온수 대수층 덕분이다. 온실에 파고든 거미 진드기는 토마토에는 관심이 없는 육식 진드기가 먹어치운다. 작물은 매년 씨를 뿌려 새로 기르는데 걷어낸 토마토 줄기는 포장재를 만드는 데 쓴다.

WUR이 생긴 배경에는 네덜란드의 국가적 트라우마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 독일에 점령당했던 네덜란드에서는 기근이 덮쳐 최고 2만명 가까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종전 10년 뒤 다시는 사람들이 굶주리는 일이 벌어지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 아래 네덜란드 정부는 WUR을 만들었다. 청소년을 잘 먹여 건강한 신체를 만들어주겠다는 것도 이 단체가 설정한 목표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 성과가 눈부시다. 19세기에만 해도 네덜란드 남녀의 평균 신장은 160㎝에 불과했다. 지금은 남자가 180㎝, 여자는 170㎝를 넘겨 세계 최장신 국가가 되었다. 인구 2000만명이 채 되지 않는 네덜란드에서 유럽 프로축구 빅리그를 주름잡는 슈퍼스타가 대를 이어 배출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WUR은 이제 네덜란드를 넘어 세계 농업의 중심이 되었다. 박사 학위 취득자 3분의 2를 포함해 학부 졸업생 45%가 외국인이다. 중국과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시아계가 비네덜란드계 유럽 학생 수를 앞질렀다. 140개국 이상에서 WUR의 지도를 받는 프로젝트 1000개 이상이 진행 중이다. 과거에는 전 세계의 5% 미만, 약 5억7000만 개에 이르는 농장만이 토양실험실에 접근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탄자니아의 농부도 몇 달러만 내면 네덜란드에 소재한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토양 샘플 정보를 받을 수 있다.

지금 예멘에서는 혹심한 가뭄으로 2000만명이 기아선상에 놓여 있다. 곳곳에서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해 유엔은 창설 이래 가장 큰 인도적 위기를 맞았다는 얘기를 듣는 형편이다. 네덜란드의 WUR은 그런 암담한 미래에 유일한 희망처럼 비치기도 했지만 최근 불길한 일이 터졌다. 거의 무균실에서 키운 닭이 낳은 양 홍보했던 달걀에서 살충제 성분이 검출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는 단순히 문제가 된 달걀을 폐기하고 농장을 소독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네덜란드가 밀어붙였던 21세기형 과학 영농의 토대가 흔들릴 수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WUR이나 네덜란드 정부가 홍보한 대로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전 법무장관을 진상조사 책임자로 선임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개선 가능한 일인지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으로 인간이 강력하게 개입하고 통제하는 농축산의 한계가 다시 드러난다면 파장은 커질 수 있다. 일단 제방에 구멍이 난 상태다.

참고한 활자: 〈내셔널 지오그래픽〉, 〈워싱턴포스트〉, 〈보물섬〉(부키)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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