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자전 〈수인〉을 펴낸 황석영 작가가 말했다. 한국의 작가는 한반도라는 감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연애며 사랑에 대해서도 마음껏 말하고 싶은데, 한국적 현실에 발목 잡혀 그러질 못했노라고 아쉬워했다. ‘역사’라는 ‘엄처시하’에 갇혀 있었다는 표현도 썼다.

마광수는 달랐다. 스물여덟 이른 나이에 대학교수가 된 이래 그는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썼다. 당대의 작가들이 역사와 민중을 말할 때 그는 에로티시즘을 노래했다. 길고 새빨간 손톱을 가진 ‘사라’와 함께 한반도라는 유교적 감옥에서 탈출하는 생을 꿈꿨다. 성과 자유를 향한 그의 열망은 동시대 작가들이 다른 가치에 쏟는 그것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시사IN 윤무영

시대가 공명하지 않았다. 세상의 99%는 눈살을 찌푸리거나 노여워했다. 그 결과 제도가 그를 옭아맸다. ‘세계 최초로 음란물로 인해 구속된 작가’라는 불명예만 부각됐다. 대학교수직도 온전히 유지하지 못했다. 해직과 복직, 휴직을 반복하다가 지난해 여름 연세대에서 퇴직했다. 우울증과 외로움으로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이야기가 풍문으로 들렸다. 그리고 꼭 1년 만에 불귀의 객이 되어 이 땅을 떠났다.

다들 〈즐거운 사라〉를 이야기하지만, 작가 마광수가 우리 사회에 이름을 알린 건 1989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에세이를 통해서였다. 이 책에서 마광수는 ‘행복은 오직 관능적 쾌감에서 온다’라며 ‘나는 사랑이 헤프고, 애무가 헤프고, 화장이 헤프고, 섹시한 옷차림이 헤픈 여자가 더 좋다’라고 말했다. 그는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을 일컬어 ‘뻔뻔스러운 독재자’나 ‘속물주의적 애국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지금 보면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신드롬 그 자체였다. 책의 상당 부분은 마조히즘, 리비도, 나르시시즘 등에 대한 문화 비평이었지만 세간의 평가는 달랐다. 지나친 쾌락주의로 우리 사회를 성적 향락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여성계 역시 마광수 교수가 여성을 성적 도구로 바라본다고 비판했다. 결국 1989년 2학기 마광수 교수의 강좌는 모두 폐지되고 만다.

2010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개정판에서 마광수 교수는 “이 책은 나의 인생길을 아주 복잡한 쪽으로 바꿔놓았다. 실력 있다는 평판을 받으며 상위권 대학의 교수로 살고 있던 나를 대다수 지배 엘리트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차가운 감자’ 취급을 받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3년 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사건이 벌어진다. 1992년 10월29일 마 교수는 강의 도중 검찰 수사관에게 연행된다. 그해 출간된 〈즐거운 사라〉가 음란물이라는 이유였다. 출판사 대표(장석주 시인)도 함께 구속됐다. 1심 재판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고, 1995년 대법원은 원심을 확정했다. 

〈즐거운 사라〉가 음란물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검찰은 주인공이 질 속에 땅콩을 집어넣어 성적 쾌감을 얻는 장면 등 총 17부분을 음란물의 사례로 적시했지만, 당시에도 법적 공방은 치열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당시 마광수 교수를 둘러싼 시대의 광기다.

당시 담당 검사가 김진태 전 검찰총장이었고, 수사를 지휘했던 검사는 심재륜 전 고검장이었다. 심 전 고검장은 1997년 한보 사건 때 김현철씨를 구속해 ‘국민 검사’ 별명을 얻기도 했다. 심 전 고검장은 마광수 교수의 정년퇴임을 앞둔 지난해 6월 〈주간조선〉과 한 인터뷰에서 “마광수 선생은 할 말 없을 겁니다. 그 소설이 도덕적으로도 나쁜 게 교수와 불륜을 벌이는 건 물론이고 엄한 아버지를 성적 대상으로 보고 있어요. 김진태 검사도 처음엔 ‘자기는 문학도로서 수사할 수 없다’고 했어요. 책을 한번 읽어보더니 ‘맡겠다’고 했어요. 발행인까지 구속했잖아요”라며 25년 전 검찰 수사에 별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법정에서 마광수 교수를 옹호했던 민용태 전 고려대 교수는 학교에 시말서를 제출해야 했다. 고려대 교수가 연세대 교수를 도와줘서 되겠느냐는 비난까지 터져 나왔다. 

그는 진보와 보수로부터 동시에 공격당했다. 한국 문단에서 그만큼 ‘시대와의 불화’를 견뎌낸 이도 없을 것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마광수의 작품에 대해 “구역질을 동반한다”라고 힐난했고, 안경환 서울대 교수는 〈즐거운 사라〉를 일컬어 “헌법이 보호할 예술적 가치가 결여된, 이를테면 법적 폐기물이다”라고 밝혔다. 안경환 교수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올랐다가 과거 저서의 여성 비하 논란 등으로 사퇴했다.

이러다 보니 보수는 물론 진보를 향한 마광수 교수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그는 백낙청 교수나 고은 시인을 향해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어서 문단정치, 문단권력이 나온다. 후배들이야 출세하려면 이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라고 하거나, 김애란 소설가에 대해서는 “왜 인기가 있나 봤더니 역시 소외계층만 다뤄. 넓은 의미의 민중문학이라서 독자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평했다. 각종 시국선언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그가 시국선언에 참여한 것은 2008년 촛불집회와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딱 두 번이다.

완고하게 ‘육체만이 진실이다’ 주장 되풀이

‘홍역’을 치르고 난 뒤 그는 더욱 완고해져갔다. 형이상학과 정신세계에 몸서리를 쳤다. 오직 ‘육체만이 진실이다’라는 유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지식인들이 명예욕에 빠지는 이유에 대해 “명예욕은 단지 ‘사회규범이 성욕을 제약하는 데 따른 박탈감’을 보상받기 위한 ‘변칙적 오르가슴 확보 수단’에 불과하다”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자칫 여성혐오로 읽히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가령 1997년 펴낸 〈성애론〉에서 마 교수는 “성은 이제 인권의 문제요, 문화적 민주화의 문제다”라며 공론화를 제안하지만, 같은 책에서 이런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기형적인 남녀평등운동 바람이 불어, 섹스 행위에 있어서도 여자가 주는 쪽에 서기보다 ‘뻔뻔하게 받는 쪽’에만 서게 됐다. 그러다 보니 요즘 남자들은 아주 죽을 지경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잘난 ‘섹스’ 하나 제공받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늘같이 마누라님을 떠받들어야만 하는 처지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강준만 교수는 마광수에게 죄가 있다면 ‘시대를 앞서간 죄’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형벌은 가혹했다. 옥고를 치른 이후 그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빠져 완성도 높은 작품 창작에 몰입하기 어려웠다. 마광수 교수 사후 그의 작품세계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공허하다. 가장 큰 불행은 그가 죽기 전까지 내놓은 수많은 작품(그는 올 초까지 개정판을 포함해 무려 90여 권에 이르는 시집, 소설, 에세이집 등을 펴냈다)을 어떤 잣대로 평가해야 할지 난망하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 사회가 그를 한반도라는 감옥에 영원히 가둬버린 건지도 모른다.

ⓒ시사IN 신선영9월5일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마광수 전 교수의 빈소가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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