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자료

‘시민 없는 시민운동’ ‘신자유주의 폐단과 사회 양극화 해소’ ‘친재벌 정부’ ‘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시민운동’ ‘포스트 노무현을 고민하지 못했다’ ‘촛불로부터 배우자’ ‘인권·환경·보건·노동·여성 이슈에 주목하자’….

진보 단체의 내부 문건 또는 성명서에서나 볼 법한 문구 같지만 그렇지 않다. 최근 보수우파 진영(시민사회) 인사들이 각종 매체 인터뷰·기고와 〈시사IN〉 취재 과정에서 쏟아낸 말이다. 이명박 정부를 ‘친재벌’로 공격하고, 신자유주의 폐단을 비판하며, 인권과 환경을 말하는 보수라? 친미·반공·반북의 대명사로만 여겨졌던 보수우파 진영 내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이러한 고민과 반성, 새로운 모색의 배경에는 바로 이명박 정부가 있다. 실정이 거듭되고 국정 지지도가 바닥을 치면서 “어떻게 되찾은 정권인데…”라는 실망감과 “이러다 함께 죽는 것 아니냐”라는 위기감이 갈수록 커지는 것이다. 현 정부와 공존하면서 길을 찾든, 아니면 ‘포스트 이명박’을 고민하든 보수우파 진영은 이제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이다. 뉴라이트 진영의 한 핵심 이론가는 이렇게 토로한다.

하는 역할도 없으면서 욕만 먹는다

“뉴라이트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이명박 정부와 공동운명체가 되어 있다. 우리도 실정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촛불시위 이후에 조금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긴 하다. 하지만 최근 종부세 논란에서 보듯 여전히 맥을 잘 짚지 못하는 것 같다. 왜 난데없이 국민 감정을 자극하는 정책을 쓰나. 취지는 이해하지만, 핵심 개혁 사안도 아닌데 말이다. 뉴라이트 진영은 ‘올해 말까지만 지켜본다’는 분위기다. 이후에도 별다른 가능성이 안 보이면, 뭔가 심각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위 뉴라이트 인사의 이어지는 언급에서도 확인되듯 보수의 실망에는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는 데 대한 섭섭함도 스며 있는 게 사실이다. “이 대통령은 뉴라이트가 이 정부 출범에 얼마만큼 역할을 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북한 인권 문제 등을 제기하며 민주 대 반민주, 통일 대 반통일 구도를 깨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본다. 그런데도 스스로 권력을 창출한 줄 안다. 지금 우리가 억울한 것은, 하는 역할도 없으면서 욕은 욕대로 먹는다는 것이다. 어떨 때는 한나라당보다 더 욕을 먹는 것 같다.”
흔히 ‘아스팔트 보수’ ‘올드라이트’로 불리는 정통 보수 쪽도 예외는 아니다. 정권 출범 초기부터 “정부가 실용을 내세우며 보수를 홀대한다”라고 불만을 터뜨려왔다. 이른바 ‘고소영·강부자 내각’ 논란과 총선 공천 과정을 거치면서는 “좌파 정권 10년 동안 보수 단체가 벌인 애국 운동의 최대 수혜자는 강남 등 버블 세븐에 사는 부유층일 것이다”라는 절망감까지 표출됐다.

하지만 정통 보수 쪽은, 촛불시위 이후 이명박 정부가 진보좌파 진영에 대해 강도 높은 ‘반격’에 나서면서 최근에는 대체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대통령이 드디어 이념 대결을 인정했다” “남북관계를 ‘정상화’시켰다”라는 조갑제씨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정통 보수 쪽 역시 속내를 들여다보면 실망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한 보수 단체 관계자는 “정통 보수 쪽 대다수는 ‘어쩔 수 없는 지지’라고 보면 된다.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며 속으로는 엄청나게 분을 삭이고 있다.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은, 그래도 이 정권을 보호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전했다.

보수, 이러다간 도매금에 순장당한다?

주류는 아니지만 보수우파 일각에서는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단절’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신혜식 독립신문 대표는 지난 7월 “청와대 최고위 인사가 ‘아스팔트 보수는 품위가 없다’고 비아냥거렸다”라는 사실을 공개하면서 새로운 보수 정당 창당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연일 강도 높은 비판을 퍼붓는 ‘보수 논객’ 이상돈 중앙대 교수(법학과)도 “이대로 가다간 ‘보수’는 이 대통령과 함께 도매금에 순장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라며 ‘탈MB’ ‘반MB’ 신진 보수세력의 결집을 호소한다.

“촛불시위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의 지지층이 취약한 게 드러나면서, 보수우파 진영 내에는 ‘미우나 고우나 할 수 없다’ ‘그래도 좌파는 안 되지 않느냐’며 무조건 MB를 밀어줘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러다간 마치 ‘미다스의 손’처럼 보수주의 전체가 오염될지도 모른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보수주의는 젊은 세대와 중간층으로부터 영영 버림받고 말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보수우파 진영의 실망과 분노가 커진 까닭은 보수세력 내 복잡한 이념 지형만큼이나 다양하다. ‘국방과 안보에 무관심하다’ ‘친북·좌파 세력을 단호하게 척결하지 못한다’ 같은 주로 정통 보수 쪽에서 제기하는 문제도 있지만 개중에는 ‘독단적 리더십’ ‘사면권 남용’ ‘친재벌 정책’ ‘불필요한 국민 분열 조장’ ‘언행의 불일치’ 등 대다수 국민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까지도 공감할 만한 지적이 적지 않다.
 

ⓒ연합뉴스보수우파 진영 내에서는 최근 교과서 개정 움직임이 또다른 편향을 낳을 수 있다는 염려도 나온다.위는 교과서 개정 촉구 집회를 하는 보수 교육 단체 관계자.

흥미로운 것은 보수우파 정권을 ‘상징’하는 정책이라 할 수 있는 종부세와 교과서 개정 문제에 대해서도 이견이 상당하는 점이다. 앞서 뉴라이트 핵심 이론가도 지적했듯, 정부의 종부세 완화 강행은 서민의 반감과 상실감을 불러일으켰다는 비판이 많다. 한 정통 보수 쪽 인사도 “뙤약볕 아래 아스팔트 위에서 좌파 정권과 싸우던 사람들은 종부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가난한 이가 대부분이다”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정권과 보수우파 단체 일각에서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교과서 개정 시도에 대해서도 역시 ‘또다른 역편향’과 ‘이념적 분열’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용환 한반도선진화재단(이사장 박세일) 사무총장의 말이다.

“이명박 정부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

“역사 교과서가 왜곡된 것은 맞다. 패배주의 역사가 아니라 모든 국민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긍지를 느낄 만한 역사 서술도 필요하다. 그러나 진실은 은폐할 수가 없으며 한쪽만 강조할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교과서는 ‘사실’ 중심으로 기록하고, 관련한 이견과 논쟁은 학문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 더구나 지금은 경제가 매우 어려운 상황 아닌가. 국민이 하나로 힘을 모아야 할 때 교과서 개정 문제를 둘러싸고 불필요한 이념 갈등과 분열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렇게 조금은 ‘생경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은 보수의 처지가 어느 날 갑자기 바뀌어서가 아니다. 순전히 정치 상황의 변화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정권 교체로 인해 이제 보수는 과거의 ‘레퍼토리’만 반복할 수 없게 됐다. 모든 걸 ‘친북좌파 정권 탓’으로 돌리던 시대는 끝났으며, 각각의 사안에 대해 책임 있고 설득력 있게 답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와 관련해 전경웅 한국인터넷미디어협회 사무국장(보수 인터넷 매체 ‘프리존뉴스’ 기자)은 “과거에는 친북이냐 반북이냐를 잣대로 투쟁하면 됐지만 지금은 그런 현안이 많이 줄었다. 거대 담론을 중심으로, 정치적·이념적 대립각을 세워 싸우는 것만으로는 어려워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보수우파 진영에 ‘앞으로 무엇으로 먹고살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거리를 던졌다”라고 말한다.

단체 차원이든 개인 의견이든, 최근 보수 시민사회 쪽에서 다양한 현안에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는 것은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용환 사무총장은 “이제는 보수 단체도 각자의 비전과 정책으로 생존경쟁에 뛰어들어야 할 때다. 어느 세력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는지 국민으로부터 냉정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한 보수 단체 관계자는 또 “보수우파 진영 내에는 이명박 정부가 어차피 남일 수밖에 없다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인식이 상당히 퍼져 있다. 그 때문에 보수우파의 자립이 다른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에 비판할 것은 분명히 비판한다는 기류가 생긴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연합뉴스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소통이 가능할까. 지난 6월 서울시청 광장에서 대치 중인 보수·진보 단체.

그러나 그간 ‘반대’ 싸움에만 매몰되어 있던 보수우파 진영 처지에서 자립은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우리는 ‘포스트 노무현’을 생각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면 잘해주리라고 믿고 낙관만 했다. ‘반노무현’ 기조 외에도 의제·정책 개발이나 비전 제시, 시민사회 단체로의 변모나 다양한 실험으로 내적인 공력을 쌓아야 했지만 소홀했다. 정권 창출 이후 정부와의 관계, 중립성·객관성 확보 방안이 막연했다”라는 강승규 전 라이트코리아 공동대표의 고백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빈곤과 재분배, 삶의 질을 말하는 보수

이재교 변호사(뉴라이트재단 이사)는 진보·개혁 성향의 시민단체에서 주로 이야기해온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한계를 지적한다. “명망가 중심의 운동이라는 한계가 보수우파 시민운동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좌파 쪽의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에 비교해볼 때 그 정도가 더 심한 게 사실이다. 회원의 참여와 뒷받침 없는 시민운동은 상체만 크고 하체는 부실한 육상선수와 다를 바 없다. 거대 담론만으로 지지와 지원을 기대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는 길은 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시민운동일 것이다. 국민 생활에 밀접한 주제를 중심으로 활발한 운동을 펼쳐야 한다.”

이미 보수우파 진영에서는 각 분야의 지식인을 영입해 정책연구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빈곤·실업·방송통신·문화예술 등 다양한 영역으로 관심을 넓히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최근 선진화위원회와 북한위원회를 신설한 뉴라이트재단(이사장 안병직)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선진화 싱크탱크’로 자리 잡겠다는 의욕을 보인다. 한반도선진화재단은 이명박 정부 아래서 ‘빈틈’이 생길 수 있는 빈곤 퇴치, 부의 재분배, 사회통합 부문에서 적극 제언을 하겠다는 구상이다. 지난 3월과 5월, 방송통신정책센터와 문화예술정책센터를 각각 발족시킨 뉴라이트전국연합(상임의장 김진홍)도 ‘바른정책포럼’과 ‘뉴라이트 싱크탱크’를 만들어 그간 소홀했던 정책 역량을 확충한다는 계획이다.

윤여준 전 한나라당 의원이 최근 밝힌 ‘현대 보수주의의 21세기 노선’이 주목되는 까닭 역시 이러한 흐름과 관련이 깊다. 윤 전 의원은 얼마 전 발행된 〈신동아〉(9월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보수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두 나와 있다”라며 지난 5월 프랑스 일간지에 실린 한 칼럼을 소개했다.

“핵심 내용을 정리하면 현대 보수주의의 21세기 중심적 논쟁거리는 ‘삶의 질’이라는 것이다. 이제 개인의 자유만 얘기해서는 부족하고 경제를 제일로 내걸었던 대처리즘도 한물갔다는 이야기다. 이제 보수의 중심 논제가 경제에서 사회·환경·건강·여성 문제 등으로 옮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삶의 질의 문제다. 우리는 지금 경제만 죽어라 외치고 있는데 말이다.”

일각에서는 그간의 ‘극한 대결 구도’를 넘어 사회통합과 정책 공조를 위해 진보 쪽과 적극 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뉴라이트의 한 핵심 이론가는 “무슨 일만 터지면 서로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시대는 끝내야 하지 않겠느냐.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자신감과 여유를 가진 보수가 먼저 진보 쪽과 ‘소통’에 나서야 한다”라고 말했다.

“진보와 함께 교과서·사회개혁 논쟁해야”

“사실 1980년 5월 광주가 없었다면 386이 있었겠느냐.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보수주의 책임도 크다는 이야기다. 반대로 일부 철없는 좌파는 북한 반대 시위에 나온 할아버지들을 향해 꼴통이라고, 빨리 죽으라고 욕을 한다. 이제 이런 대립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서로 장점을 인정해주면서 화합하려고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 서로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극우와 극좌는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교과서 논쟁도 하고 사회개혁 논쟁도 해야 한다.”
한반도선진화재단은 일찍부터 “영국 보수당이 영국 노동당으로부터, 미국 공화당이 미국 민주당으로부터 배우는 시대다. 보수가 모두 선이고 진보가 모두 악이라고 보지 않는다”라며 양측 간의 ‘정책 융합’을 추진해온 바 있다. 또한 이 재단은 오는 10월 중순부터 ‘보수란 무엇인가’ ‘진보란 무엇인가’ 세미나를 잇달아 개최해 양측의 정체성 확립과 접점을 모색할 예정이다.

9월29일 30여 보수우파 단체를 중심으로 발족한 ‘미디어발전국민연합(미발연)’이 13대 과제 중 하나로 ‘진보좌파 언론단체와 적극적인 대화 및 소통’을 제시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이 단체 결성을 주도한 변희재 실크로드CEO포럼 회장은 “보수-진보가 양극단으로 나뉘어 될 만한 일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포털 규제 등은 충분히 함께 할 수 있는 이슈다. 진보 쪽에서 제기하는 사안도 보수의 가치에 어긋나지 않으면 공조할 수 있다. 일이 되도록 하자는 취지로 보면 된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미발연의 이러한 시도는 바로 그 ‘13대 과제’ 때문에 진보 쪽으로부터 빈축을 산다. ‘미디어오늘 광고주 불매운동’ 등 역으로 분열·대립을 조장하는 내용이 가득한 탓이다. 변 회장은 이에 대해 “명백히 좌우를 편 가르기해 분열을 조장해온 매체가 바로 미디어오늘이다”라고 반박한다.
소통 자체를 반대하는 세력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도 〈시사IN〉과 인터뷰에서 “합리적 보수가 있어야 합리적 진보도 설 수 있다. 서로 소통하면 나쁠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위 미발연 사례에서 보듯 서로 ‘적대의 골’이 워낙 깊어 과연 접점이 마련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여하튼 ‘소통에 무능한 정부’ 때문에 공멸의 위기에 몰린 보수우파 진영이 나름 ‘통 큰 소통’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자명 고동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intered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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