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넌 이후, 트럼프는 누구 말을 들을까?
  •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 호수 520
  • 승인 2017.09.0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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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그림자 대통령’으로 불린 스티브 배넌 전 수석전략가가 백악관에서 쫓겨났다. 배넌 휘하의 국수파 쪽으로 기울어 있던 세력균형의 추가 흔들릴지 관심을 모은다.

지난 1월 하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그림자 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국정에 깊숙이 관여하며 막강한 위세를 떨쳤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최근 쫓겨났다. 그동안 미국 내외에서 강한 반발을 일으킨 ‘무슬림의 미국 입국 금지’ ‘파리기후협약 탈퇴’ ‘이민 반대’ ‘자유무역협정 반대’ ‘미군의 해외 개입 반대’ 등 국수주의 의제들은 모두 배넌의 작품이었다.

ⓒAP Photo8월18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리는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위)가 전격 경질되었다.

트럼프 취임 이후 백악관에서는 대략 세 개 파벌이 서로 치열하게 경쟁·대립해왔지만, 세력균형의 추는 배넌 휘하의 국수파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국수파들은 이른바 미국 우선주의를 신봉하며, 반이민과 반자유무역협정,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파기 등을 주장하면서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주류의 반발을 샀다. 두 번째 파벌로는, 작은 정부와 연방정부 지출 감소 등을 신봉하는 주류파 보수주의자들을 꼽을 수 있는데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그 중심이다. 세 번째 파벌은 친기업 정책(감세, 규제완화 등)과 파리기후협정 유지 등을 선호하는 친(親)월스트리트 보수주의자 혹은 국제파다. 백악관 국가경제자문위원회 게리 콘 위원장이 대표적 인사다. 이 외에도 국제파에는 H. R. 맥마스터 국가안보보좌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의 맏딸인 이방카와 사위 재러드 쿠슈너도 포함된다.

국수파의 거두인 배넌이 축출되면서 트럼프가 나머지 두 파벌, 특히 콘 위원장이 이끄는 국제파 쪽으로 기울 것이냐가 특히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배넌이 축출된 뒤 트럼프가 보인 첫 행보는 일단 국제파에 청신호다. 후보 시절에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철수’를 강력히 주장했던 트럼프가 배넌 축출 나흘 뒤인 8월22일 돌연 미군 증파를 결정했다. 그동안 배넌은 매주 화요일 열리는 국가안보회의(NSC) 정례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해 아프간에서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왔다. 이로 인해 미군 증파론을 고수하던 맥마스터 안보보좌관, 매티스 국방장관, 틸러슨 국무장관 등과 갈등을 빚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배넌의 주장을 두둔했다. 

배넌은 국무부와 국방부의 인사 문제까지 관여했다. 틸러슨의 핵심 참모인 수전 손턴 국무부 동아태 담당 수석부차관보를 축출하려던 이가 바로 배넌이다. 매티스 국방장관이 공화당 행정부 고위 관리 출신 엘리엇 에이브럼스를 국방부 부장관으로 발탁하려 하자 방해하기도 했다. 저명한 민간 연구단체인 미국기업연구소(AEI) 대니얼 플레카 외교국방정책 담당 부소장은 <폴리티코>와 인터뷰하면서 “백악관 내 고립주의파(국수파)와 국제파 간의 세력균형을 살펴보면 그 추가 국제파로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라고 진단했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배넌의 축출로 콘 위원장과 쿠슈너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파가 트럼프 행정부의 국정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하지만 국수파의 완패를 진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트럼프가 반이민·반자유무역협정 등 다른 고립주의 의제까지 손보게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여서다. 실제로 트럼프는 배넌을 퇴출시키기 직전인 8월14일,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 행위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에 대해서만은 경제 전쟁을 도발할 각오를 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이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을 밀어붙인 것도 트럼프의 반자유무역 기조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방증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뉴욕 타임스>에 “국수파가 타격을 입었다는 식으로 언론이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 같다. 아직도 백악관에는 국수파 인사들이 수두룩하다”라고 밝혔다.

극우 매체 회장으로 복귀한 스티브 배넌

ⓒdpa
ⓒAFP PHOTO국수파스티븐밀러백악관정책담당 선임고문(위)과 세바스티안 고르카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

아닌 게 아니라 현재 백악관에는 배넌 못지않게 트럼프의 국수적 본능을 자극하는 핵심 인사들이 건재하다. 백악관 정책 담당 선임고문이자 배넌의 직계로 꼽히는 스티븐 밀러를 꼽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 ‘7개 무슬림 국가 출신들의 미국 여행금지’ 명령을 발동했을 때 막후에서 관련 내용을 조정하고 조언한 장본인이 바로 밀러와 배넌이었다. 밀러는 지난해 봄 트럼프 캠프에 합류한 뒤 백악관 내에서 상당한 입지를 구축한 것으로 전해진다. 종종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며 트럼프의 대외정책을 옹호하는 데 앞장서온 세바스티안 고르카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도 배넌의 우군이다. 비교적 생소한 얼굴이지만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으로 있는 마이클 앤턴 역시 국수파에 속한다.

배넌 또한 ‘바깥세상’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뒤 백악관 내부의 반대파들에 대한 구원(舊怨)을 풀려고 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백악관에서 축출된 당일, 자신이 만든 극우 온라인 매체 <브레이트바트>의 회장으로 복귀했다. <블룸버그 뉴스>와 인터뷰에서는 “비록 백악관을 떠나지만 (이후부터) 트럼프의 적들을 향한 전쟁에 출전할 것이다”라면서, 그 대상으로 의회와 언론, ‘반트럼프 기업가’ 등을 꼽았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수석고문을 지낸 데이비드 액설로드는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배넌은 이제 정책 입안자가 아니다. 그러나 <브레이트바트>로 계속 트럼프를 흔들어대면서 대통령과 소통을 유지한다면 배넌의 영향력이 커질 수도 있다”라고 진단했다. 배넌은 지금도 트럼프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고 있는 극소수 인사 가운데 하나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도 배넌과 완전히 연을 끊기는 어렵다. 지난 대선 때 ‘성난 백인 노동자’들을 대거 투표장으로 끌어내 트럼프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 배넌이었다. 트럼프가 2020년 재선에 도전할 경우, 자신의 핵심 지지층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배넌을 재기용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지난해 트럼프 지지 성향 유권자들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자유무역협정 반대’ ‘해외 개입 반대’ ‘불법 이민자 추방’ 등 배넌이 주장한 5개 의제에 모두 동의하는 ‘핵심 지지층’이 15%에 달했다. 이들은 트럼프 핵심 지지층인 동시에 배넌 지지층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핵심 지지층을 2020년 대선 때 다시 규합하려면 배넌 같은 우익 모사꾼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트럼프는 어떤 식으로든 배넌과의 유대 관계를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트럼프가 트위터를 통해 “배넌은 <브레이트바트>에서도 강인하고 명민한 목소리를 낼 것이며, 아마 종전보다 훨씬 더 잘할 것이다”라고 추어올린 것도 심상치 않다. 

트럼프가 앞으로도 ‘외부 인사’인 배넌으로부터 계속 조언을 받는다면 ‘배넌이 일하는 장소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베테랑 정치 분석가인 제럴드 세이브 워싱턴 지국장은 “배넌이 백악관 바깥에서도 트럼프에게 계속 큰 영향을 미칠지 두고 볼 일이다”라고 썼다. 대선 여론분석 전문 웹사이트 ‘파이브서티에이트(fivethirtyeight.com)’의 선임 분석가 해리 엔턴은 “트럼프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으로 변할 것으로 기대해선 안 된다. 배넌이 더 이상 트럼프 행정부의 일원은 아니지만 ‘배넌주의’는 이미 ‘트럼프 정치연대’의 일부로 자리잡았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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