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일본인 여성 아나키스트
  • 이오성 기자
  • 호수 519
  • 승인 2017.08.28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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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로 무정부주의자 가네코 후미코의 삶이 주목받고 있다. 일왕제에 맞섰던 그녀는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옥사했다. 여성으로서 사회적 정체성도 고민했다.
여기 한 명의 여성이 있다. 일본 이름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한국 이름 박문자. 영화 <박열>에서 주인공의 동지이자 아내로 등장하면서 비로소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인물이다. 제국주의 본진인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제(천황제)의 부조리함을 고발하다 감옥에서 스물세 해의 짧은 생을 마쳤다.

가네코 후미코는 우리가 익히 아는 여성 혁명가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불세출의 혁명가가 아니었다. 매혹적이라는 수식어로 포장되는 근대 여성도 아니었다. 배움도 배경도 없는 동아시아의 ‘흙수저’ 그 자체였다. 그녀의 삶은 다만 처절하고 치열했으며, 그러므로 혁명적이었다.

영화 <박열>이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극장가에서 내려간 뒤에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관심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뒤늦게 영화를 접한 이들 사이에서 그녀의 삶에 공명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관련 서적을 펴냈던 출판사는 개정판을 준비하는 등 여운이 길다. 영화 <박열>이 온전히 다루지 못했던 이 여성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녀는 무적자(無籍者)였다.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가정을 내팽개쳤고 어머니도 그녀를 돌보지 않았다.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서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그녀는 열 살에 조선으로 건너와 고모의 양녀가 된다. 충북 부강이라는 곳이었는데, 지금의 세종시 부강면이다.

ⓒ도서출판 산처럼 제공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자신의 성장 과정을 담은 수기를 썼다.

그녀는 조선에서 말로 할 수 없는 설움을 겪는다. 일본 소설 <오싱>의 주인공처럼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를 해야 했다. 구박과 차별은 일상이었다. 오죽하면 밥을 굶는 가네코를 딱하게 여긴 마을의 조선 아낙네가 일본인이었던 그녀에게 “보리밥이라도 괜찮다면 먹을래?” 하고 권했을까. 그녀는 훗날 옥중 수기에서 “조선에 머물렀던 7년 동안 이때만큼 인간의 사랑에 감동받은 적이 없었다”라고 술회했다.

식민지에서 특권을 누리며 살던 대다수 일본인과는 달리, 가네코는 조선의 피억압 민중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3·1 운동이 보여준 ‘반역의 기운’ 또한 그녀를 감화시켰다. “조선에서 있었던 비참한 기억을 말하거나 조선인이 얼마나 학대받고 있는지 이야기할 때에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박열이 말려도 막무가내였다”라고 지인이 회상할 정도였다. 그녀의 삶을 추적한 일본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는 “가네코는 일본 문명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인의 일원인 박열의 모습에서 자신이 살아갈 방향을 발견했다”라고 평했다.

“어떠한 고정된 주의도 없다”

10대 후반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가 사회주의에 눈뜬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도쿄에서 신문팔이를 하며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학습’하고 ‘투쟁’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를 교조적으로 따른 것은 아니었다. 가령 그녀는 옥중 수기에서 ‘사회주의는 민중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난동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에 변혁이 도래했을 때, 아아 그때 민중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지도자는 권력을 장악할 것이다. 그리고 민중은 다시 그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 그녀가 옥중 수기를 쓴 1925년은 러시아 혁명 이후 전 세계에 사회주의 바람이 몰아치던 때였다.

가네코는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가 되는 길을 택했다.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로 구성된 ‘흑도회’를 구성하고 그 기관지인 <흑도>를 간행한다. <흑도>에는 이런 ‘선언’이 실려 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고정된 주의(主義)도 없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뭐라고 지껄이든 말든, 검은 개(우익)가 짖든 말든 우리들에게는 우리들만의 소중한 체험과 재능과 방침이 있다. 그리고 뜨겁게 약동하는 피가 있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사회적 정체성을 직시했다. 피억압 민중 가운데에서도 가장 약자인 여성으로서 비참한 유년을 견뎠던 기억이 그녀를 기존 체제와 권력을 부정하게끔 이끌었다. 영화 <박열>에서 인상적으로 묘사되는 그녀와 박열의 동거 서약(‘동지로서 동거한다. 운동 활동에서는 가네코 후미코가 여성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한쪽의 사상이 타락해서 권력자와 손잡는 일이 생길 경우 공동생활을 그만둔다’)은 그녀가 제안한 것이었다.

ⓒGoogle 갈무리남편 박열과 함께 형무소에서 찍은 사진.
그녀는 일왕 측의 전향 요구를 거부했다.

가네코가 맞서려는 세계의 끝에는 일왕제가 있었다. 그녀에게 장자 상속 원칙을 따르는 일왕제는 국가권력과 가부장의 화신이었다. 그녀가 박열과 함께 왕세자에게 폭탄 테러를 가하려 한 ‘대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전향하라는 일왕 측의 요구를 끝내 거부한 건 이런 이유였다. 당시 판사는 그녀를 일컬어 “반항적이고 열광적이며 눈물이 많고, 때로 무서울 정도로 히스테릭하다”라고 기술했지만, 오히려 이는 그녀의 결연한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인지도 모른다.

가네코는 1926년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의 죽음이 자살이었는지 여부를 놓고 말이 많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옥중에서 쉬지 않고 자신의 성장 과정을 담은 수기를 썼다. 그러면서 더 많은 부모들, 교육가, 정치가들이 자신의 수기를 읽어달라고 했다. 사후에는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묻혔다. 감옥에서 22년을 복역한 뒤 우익 성향 재일본조선거류민단(현재의 민단) 단장을 맡아 반공주의자가 된 박열의 삶과는 퍽 달랐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로 재조명됐지만,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응시했던 인물은 적지 않았다. 우선 앞서 밝힌 일본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에게 빚진 바 크다. 야마다 쇼지의 글을 번역해 <가네코 후미코: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제국의 아나키스트>를 펴낸 정선태 교수(국민대 국어국문학)는 “저자의 성실한 자세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다. 재판 기록과 수기는 물론, 신문·잡지 등 방대한 자료를 집대성해 그녀의 삶을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2006년 한·중·일 역사학자들이 공동으로 펴낸 <미래를 여는 역사>에서도 가네코 후미코는 아시아의 사회운동가로 소개됐다. 2009년 소설가 김별아가 펴낸 <열애>도 박열과 그녀의 이야기를 다뤘다.

흥미로운 건 1984년 한국에서 이미 가네코 후미코를 다룬 연극이 공연되었다는 점이다. 원로 연극인 김의경이 집필하고, 정진수가 연출한 <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민중극단)가 그것이다. 극본을 맡은 김의경씨가 일본에서 가네코 후미코를 다룬 소설 <여백의 봄>을 접한 뒤 만든 작품이었다. 지난 6월 타계한 배우 윤소정씨가 이 작품에서 가네코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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