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덮치는 위기의 그림자
  • 장영희·박형숙 기자
  • 호수 55
  • 승인 2008.09.30 14:5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발 금융 재앙이 전세계를 강타한 가운데 한국 경제 여기저기에서 위기 징후가 보인다. 달러 부족, 과도한 빚과 내수 경기 악화, 고유가와 원자재난이 겹쳤다. 한국 경제의 현재를 진단하고 대책을 모색했다.
   
 
미국 부시 행정부는 다급하다. 부시 대통령은 9월24일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구제금융이 없으면 고통스러운 경기침체를 겪게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중앙은행 총재가 가장 금기시한다는 ‘경기침체(Recession)’라는 말까지 꺼냈다. ‘금융시장과 경제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이라고 표현한 헨리 폴슨 재무장관은 그나마 여유를 부린 셈이다.

미국 정부 수뇌부가 일제히  ‘R(Recession)의 공포’를 들먹인 데는 미국 의회를 고강도 압박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미국 의회가 7000억 달러 구제금융 법안을 승인하지 않는 한 부시 행정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의회를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고, 공화당 내부에서도 선거를 의식해 반발 기류가 있다지만, 미국 의회가 이 법안을 마냥 끌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심각한 것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미국도 난리지만 이런 불확실성은 금융 세계화 바람을 타고 태평양 건너 한국에도 상륙했다. 이번에는 ‘달러난’이다. 이미 월가의 ‘블랙 위크’(9월14~20일) 때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급등하는 등 홍역을 치렀지만 이제는 시장에서 달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졌다.

 한국 정부도 다급해질 수밖에 없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9월26일 “10월 초까지 100억 달러 이상의 외화 유동성을 외화 자금시장(달러화 등 외화를 사고 파는 외환시장과 달리 외화를 빌리고 빌려주는 외화 대차시장)에 공급하겠다”라며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당일 전격적으로 정부는 국환평형기금을 풀었다. 한 시장 관계자는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계 은행 지점들조차 본점에서 돈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며, 외환위기 이후 처음 겪는 달러난이라고 반응했다. 한국 정부로서도 이례적 상황이다. 2003∼2004년 원화 확보 차원에서 외화 자금시장에 들어간 적은 있지만, 외화 유동성을 투입하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령 미국에서 법안 통과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해도 한국을 비롯한 나라들은 얼마나 더 이례적 상황에 당면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우선 법 통과로 미국 정부가 부실채권 정리 작업에 돌입한다 해도 파산 행렬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역경매, 즉 최저가 매입 방식은 영업력과 자금력을 갖춘 대형 금융회사의 부실채권 정리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중·소형 금융회사들은 매입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벌써부터 월가에서는 금융회사 1000여개가 도산하리라는 예측이 나온다.

“전세계가 불황으로 ‘경착륙’할 것”

‘금융 사회주의’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미국 역사상 초대형 구제금융이라지만, 이것이 파산 위기에 내몰린 제너럴모터스(GM) 같은 제조업 회사를 구제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월가에는 투자은행(IB)들이 매일 밤 전체 빚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을 구하느라 진땀을 흘린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월가 금융회사는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제 코가 석 자다. 이런 월가의 신용경색은 미국 내 기업을 도산으로 내모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 기업도 신용위기의 덫에 가둘 공산이 크다.

무엇보다 앞날을 내다볼 수 없게 하는 것은 이번 금융위기의 진앙지인 미국 주택시장 문제다. 지금도 집값은 속절없이 떨어지고 있다. 새 주택이든 기존 주택이든 가격이 떨어지고 있을뿐더러 잘 팔리지도 않는다. 그러니 24.48%나 된다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이 높아지면 높아졌지 떨어질 리 없고, 모기지를 증권화(유동화)해 사고 판 금융회사의 부실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모든 거품 가운데 주택 버블이 가장 악성’이라는 말이 있듯이 전망도 비관론 일색이다. 9월24일(현지 시각) 미국 프린스턴 대학 교수들이 연 금융위기 대토론회에서 폴 크루그먼 교수는 “주택 가격이 앞으로 2년간 25% 더 하락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현송 교수도 “과거에도 집값이 하락하기 시작하면 회복하는 데 5~6년씩 걸리곤 했다”라며 현재 확정된 서브프라임 손실 규모가 5000억 달러 수준이지만, 앞으로 1조~1조5000억 달러로 2~3배 늘어나리라고 내다봤다.

   
ⓒ뉴시스
지난해 12월28일 이명박 당선자가 서둘러 찾아간 곳이 재벌 총수의 모임인 전경련이었다(위). 그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구애는 별 성과가 없는 듯하다.
이미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전이되어 미국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져드는 징후는 뚜렷하다. 지난해 8월 4.7%였던 실업률이 가파르게 상승해 8월 6.1%를 기록했다. 신규 실업급여 신청자가 7년 만에 최고 수준을 보이는 등 9월 상황은 더 나쁘다. 지난 7월 개인소득도 2005년 8월 이후 가장 큰 폭으로 감소(0.7%)해 소비경기를 어둡게 한다. 이미 개인의 소비지출 증가율은 지난해 말 이후 1% 포인트 이상 떨어졌다. 2분기 GDP 성장률은 3.3%를 기록했지만, 올 11월과 내년 초 발표될 3분기와 4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보이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 대학 교수는 “미국에서 12~18개월에 걸친 길고도 힘겨운 최악의 불경기가 이어질 전망이고 전세계 경제도 동조화하면서 불황으로 경착륙하리라 본다”라고 예측했다. 이미 유럽과 일본에는 불황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중국 등 이머징 마켓이 선전해 완충 구실을 하리라는 전망이 나오지만, 한국 경제가 고전을 면치 못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졌다. 유종일 교수(KDI 국제정책대학원·경제학)는 “한국 경제는 미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줄어들긴 했지만 대외 의존도가 매우 높고 금융시장이 거의 완전 개방되어 있어서 해외발 악재에 대한 변동성이 매우 큰 나라다. 국내에도 위기 요인이 적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유 교수뿐 아니라 상당수 경제학자가 우선 꼽는 위기 요인은 빚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올 6월 말 현재 가계대출과 판매자 신용(신용카드회사나 할부금융회사로부터 물품을 외상 구입)을 합친 가계부채(가계신용)는 660조3060억원에 이른다. 가구당 4000만원 빚이 있는 셈이다. 이 가운데 가계대출은 622조9000억원에 이르는데, 2003년 말에 비해 무려 200조원 이상 늘었다. 외환위기 때는 기업 부채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가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가계 빚은 폭증했지만, 채무부담 능력은 외려 약해졌다(오른쪽 도표 참조). 부동산 같은 실물자산을 팔지 않고, 즉 금융자산으로 금융부채를 상환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인 금융자산 대비 금융부채 비율이 지난해 다소 좋아졌다가 올 들어 다시 나빠졌다. 자신이 벌어들인 소득으로 빚을 갚을 능력을 보여주는 처분가능소득 대비 금융부채비율도 소득이 줄어들면서 2004년 이후 상승 일로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6월 말 현재 적자 가구 수는 전체 가구의 28.1%에 달한다. 네 집 걸러 한 집은 소득보다 더 쓰고 있다는 것이고, 빚을 내 적자를 메운다.

미국발 위기는 이미 악화한 내수 경기를 더 나쁘게 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고물가·고유가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서민 경기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는 음식점, 목욕탕, 미용실, 카센터, 옷가게, 전자제품 대리점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휴폐업이 속출한다. 주가가 급락하고 원금을 밑도는 펀드가 속출한 것은 중산층을 직격했고, 이런 마이너스 부(자산)의 효과는 소비를 더욱 억제해 자영업자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자영업자 수는 2005년 611만6000명에서 올 상반기에는 594만5000명으로 3년 연속 줄었다.

“쓸 만한 중소기업 절반 도산할 수도”


 자영업 몰락이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에서 자영업 대출 규모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것은 위기의 징후로 읽을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도·소매와 숙박·음식점업 등 4대 생계형 자영업자의 대출 금액은 2005년 56조4662억원에서 지난해 75조5929억원으로 껑충 뛰었고, 올 6월 말에는 83조4537억원으로, 3년 새 무려 47.8%나 치솟았다.

   
 
유경준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에 따르면, 중산층(중위소득 50~150%) 비중이 1990년대 초반에 비해 10% 이상 줄어들고 빈곤층(중위소득의 50% 미만) 비중이 외환위기 때보다 높아졌다. 두 계층의 소득 점유율은 매년 줄어드는 추세인데, 상류층으로 소득이 이전되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두드러지긴 했지만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한국에서는 소득 양극화가 날로 깊어지고 있다. 이런 한계 계층이 켜켜이 쌓여가는 상황에서 미국발 악재 같은 위기 조짐은 진짜 위기로 돌려놓은 파괴력을 지닌다.  

가계대출 623조원 가운데 36.8%(229조5000억원)를 차지하는 주택담보대출도 눈여겨 봐야 한다. 부동산 가격이 떨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정부가 총부채상환비율(DTI·소득 수준에 따라 대출액을 제한하는 것인데, 수도권 투기과열지구 내 시가 6억원 초과 아파트 구입 시 대출 한도는 연간 소득의 40% 이내)을 도입하는 등 주택담보대출 억제에 나서 가계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기는 했다. 하지만 여전히 주택담보대출 규모가 높은 수준이고, 대출금리가 오르고 소득은 줄어드는 상황이라 집값이 본격 떨어지기 시작하면 상황이 급속히 나빠질 수 있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이 일축했듯이, 금융권 일각에서 제기되는 한국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발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지난해 말 담보인정비율(LTV)은 52.2%로, 집값이 반토막 나는 극단적인 부동산 불황이 아니라면 은행이 집단 부실에 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집값이 조금만 떨어져도 주택 가치가 대출 금액보다 낮아지는 미국과는 다르다. 모기지 유동화 비율이 미미한 것도 미국과는 다른 점이다.

금융회사 가운데 은행은 비교적 안전지대에 있는 듯하지만, 저축은행은 취약 분야로 꼽힌다. 전국 106개 저축은행의 지난해 순이익은 30%나 급감한 터다. 지방의 집값이 떨어지고 대규모 미분양 사태 등으로 12조원 수준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이 대거 부실에 빠진 탓이다. 올 들어 PF대출 증가세는 멈추었지만 문제는 연체율. 지난해 말 11.4%에서 올 6월 말에는 14.3%까지 치솟았다.
저축은행을 빼면 금융회사들은 대체로 사정이 괜찮은 편이지만, 중소기업은 딴판이다. 김영호 유한대학 학장(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한국 경제에서 가장 약한 고리는 중소기업이다. 이미 고유가와 원자재난으로 녹다운 지경이다. 미국발 위기가 실물경제로 본격 옮겨붙어 대기업의 쥐어짜기가 더 심해지면 쓸 만한 중소기업 2000개 가운데 절반은 1, 2년 내 도산하리라 본다”라고 걱정했다. 정부는 대기업이 수조원을 쌓아놓고도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압박하지만 투자는커녕 생존조차 어려운 것이 중소기업의 현실이다. 기업 규모 간 양극화도 극심한 것이다.

고유가와 원자재난은 경제 전체의 위협 요인이다. 원유는 무역적자 주범인데, 7월 이후 100달러 밑에서 안정세를 보이던 유가가 최근 다시 불안해졌다. 추워질수록 난방유 수요도 급증하므로 기름 소비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국제 유가가 10% 포인트 오르면 성장률은 0.2% 포인트 낮아진다.

경제 전문가들 “보수적 경제 운영” 한목소리


원자재 가격이 여전히 높은 상황에서 철강재 수입이 급증하고 수출 증가율은 낮아져 9월에도 큰 폭으로 무역적자가 날 전망이다. 아직 미국발 실물위기가 반영되지도 않은 상황인데, 올 들어 8월까지 무역수지 누적 적자 규모는 123억4000만 달러에 이른다. 여기에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의 ‘셀 코리아’가 멈추지 않으면 경상수지도 큰 폭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외환 유동성을 늘 예민하게 챙겨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경상수지 적자가 두통거리일 수밖에 없다.

   
ⓒAP Photo
지난 9월22일 월가의 상징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중개인들이 미국 정부의 7000억 달러 구제금융 법안에 대한 후속 뉴스를 지켜보고 있다.
미국발 위기는 한국에 어떤 모습으로, 어느 정도 깊이로 찾아올까. 이미 나라 안에 위기 요인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나라 밖 악재는 진짜 위기로 전이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 전문가들은 보수적 경제 운용을 주문한다. 외부 충격을 누그러뜨리는 안정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정부가 지금같이 제대로 못할 바에는 차라리 내버려두라”고 냉소했다. 그러면 서서히 나빠질 뿐 급전직하는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책의 시계를 ‘장기’에 맞춰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최윤재 교수(고려대·경제학)는 “성장을 위해 다른 목표를 희생해도 좋다는 조급한 태도와 단기 경기 부양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그가 보기에 한국 경제의 핵심 문제는 낮은 성장률이 아니라 성장의 혜택이 고르게 돌아가지 않는 양극화의 심화다.

강만수 장관은 감세로 대기업과 부유층이 투자와 소비를 늘려 성장률이 높아지면 그 과실이 중소기업과 서민층에게도 돌아간다는 이른바 ‘낙수 효과’를 주장했지만 기대 난망이다. 양극화 심화로 계층 간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는 탓이다. 한 경제학자는 정부가 낙수 효과를 주장할 게 아니라 ‘분수 효과’를 꾀해보라고 제안했다. 서민과 중산층을 집중 지원해 그 성과가 위로 올라가게 하라는 주장이다.
‘MB노믹스’의 중심을 공격하는 경제학자도 적지 않다. 유종일 교수는 “감세, 규제 완화, 민영화, 개방을 키워드로 하는 MB노믹스는 박정희 시대 모델과 미국의 신자유주의 모델이 혼합되어 있는데, 모두 실패한 모델 아니냐”라고 비판했다. 현재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MB노믹스로는 치유할 수 없을뿐더러 도리어 거꾸로 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현재 감세·규제 완화와 관련해 정부가 내놓는 여러 정책은 양극화 해소에 역행하며 위험한 구석이 있다. 기획재정부가 9월25일 발표한 ‘2009년 국세 세입예산 및 중기 국세 수입전망’은 우선 내년도 성장률을 5%로 잡은 것도 납득하기 어렵지만, 내용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서민과 중산층을 위해 감세했다면서 종합부동산세와 법인세 등에 감세 효과가 집중될 뿐, 근로소득세와 종합소득세는 30% 가까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소득 재분배 기능이 없는 역진 세금인 부가가치세도 대폭 늘어난다.
기본적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은 정부 규모가 가장 작으며 사회안전망 관련 지출도 내놓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한국은 아직 복지국가 문턱에도 들어서지 않았다. 조세부담률도 최저 수준에 속한다(위 도표 참조). 고소득층에 대해 증세해도 시원치 않은 판에 감세하겠다니, 무슨 돈과 인력으로 서민과 중산층을 돌보겠다는 건지 요령부득이다.

 태평양 건너 사정을 눈을 크게 뜨고 경계해도 불안하고 오금이 저린 판국에 요즘 정부 여당이 꺼내놓은 것은 종합부동산세 감세여서 많은 국민을 아연하게 한다. 나라 밖 위기가 나라 안의 위기 징후와 결합하려는 심상치 않은 조짐이 그들은 정녕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