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5촌 살인사건’의 의혹을 밝혀줄 단서 일부가 공개되었다. 〈시사IN〉은 살인 사건 당시 박용철·박용수씨의 휴대전화 통신 내역(2011년 8월6일~9월6일)을 단독 입수했다. 이 통신 내역과 핵심 증인 등의 경찰 진술 조서 등을 대조해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경찰은 2011년 9월8일 ‘사촌형 박용수씨가 사촌동생 박용철씨를 살해하고 자살했다’라고 사건 발생 이틀 만에 발표했다. 하지만 발표 당시부터 의혹이 제기되었다. 숨진 두 사람의 몸에서 졸피뎀·디아제팜 같은, 처방전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수면제 성분이 발견됐다. 둘 다 처방을 받은 사실은 없었다. 또 박용철씨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칼과 망치에 살인범으로 지목된 박용수씨의 지문이 나오지 않았다. 목을 매 자살한 박용수씨 곁에 놓인 가방에서도 회칼이 한 점 더 발견되었다. 그 칼에서조차 박용수씨의 지문이 나오지 않았다. 박씨는 손가락이 노출된 반장갑을 끼고 있었다(〈시사IN〉 제273호 ‘친척 간 살인사건 새 의혹’ 기사 참조).

ⓒ시사IN포토2011년 9월6일, 서울 북한산국립공원 사무소 근처에서 박용철씨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박용철씨의 유족은 의혹을 풀고 싶다며, 지난해 12월 서울북부지방검찰청을 상대로 박용철씨와 박용수씨의 휴대전화 통신 내역 공개를 요청했다. 검찰은 ‘공개로 인해 비밀로 보존해야 할 수사 방법상의 기밀이 누설되거나 불필요한 새로운 분쟁이 야기될 우려가 있다’며 거부했다. 유족들은 행정소송을 냈고, 지난 6월 1심에서 승소했다. 검찰은 항소를 포기했고 통신 내역을 유족에게 제공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특히 주목되는 핵심 증인은 박용철·박용수씨의 후배 황선웅씨다. 그는 둘과 마지막 술자리를 함께했다고 경찰에 진술한 장본인이다. 황씨와 박용철·박용수씨의 인연은 2007년 육영재단 폭력 사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폭력 사태에 관여한 조직폭력배 ‘짱구파’ 일원으로 알려진 황씨는 이후 육영재단 어린이회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황씨는 두 사람이 숨진 채 발견된 2011년 9월6일 서울 강북경찰서에 출석해 행적을 상세히 진술했다(인용문은 모두 경찰 진술 조서 내용이다). 황씨는 “전날 저녁 7시경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스텝이라는 바에서 두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 술을 마셨다”라고 말했다(강남구청에 따르면 황씨가 술을 마셨다고 진술한 ‘스텝바’라는 상호가 당시 신사동에 없었다). 그런 다음 그는 “박용철씨의 차를 운전해 왕십리에 있는 ○○노래방에 저녁 9시 정도에 도착했고, 자정 즈음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둘이 나가버렸다”라고 진술했다. 황씨는 “마지막 술자리에서 인사도 않고 사라진 두 사람이 걱정돼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라고 진술했다. “평소 변사자들과 연락을 자주 했느냐”라는 경찰의 질문에 황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박용철과는 (2007년 육영재단) 어린이회관에 근무했는데 이후에는 한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다. 박용수와는 가끔 통화했다.”


경찰은 둘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캐물었다. “진술인은 변사자들이 최근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있나?” 황씨는 “한동안 연락도 하지 않고 최근에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두 사람과의 마지막 통화를 언제 했느냐는 경찰관의 물음에 “노래방에서 먼저 용수형과 용철이형이 가서, 어떻게 잘 들어갔는지 연락을 했다. 그때(9월6일) 새벽 0시20분경에 용수형, 새벽 0시40분 45분경에 용철이형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라고 진술했다.

9월7일 낮 12시55분 경찰에 다시 출석한 황씨는 “지난주에 용수형이 연락해 다음 주에 보자고 했는데 언제 어떻게 보자 약속은 하지 않았다. (9월5일) 점심이 지나서 연락이 왔다. 그때도 ‘오늘 만나자’는 약속은 정하지 않았다”라고 진술했다.

ⓒ시사IN 김은지 정리, 최예린 디자인

하지만 이 같은 황씨의 진술은 휴대전화 통화 내역과 달랐다. 그 기간에 황씨는 박용수씨에게 6차례 전화를 걸고 4차례 문자를 보냈다. 박용수씨 또한 황씨에게 27차례 전화를 걸고 4차례 문자를 보냈다. 황씨와 박용수씨 사이 연락은 사건 당일이 가까워질수록 빈번했다. 사건 직전인 8월31일, 9월1일, 9월3일, 9월4일 거의 매일 이뤄졌다. 사건 전날인 9월5일 하루 동안에만 서로 전화를 8차례 주고받았다. ‘9월5일 저녁 6시 반쯤 박용수의 제안으로 갑자기 둘의 술자리에 합석하게 되었다’는 황씨의 진술과 어긋난다. 심지어 경찰이 확보한, 박용수씨 휴대전화 캡처 화면에는 9월6일 새벽 0시20분에 1분 동안 황선웅씨와 통화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라는 황씨의 말과 어긋난다. 


이런 단서를 입수하고도 경찰은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황씨의 진술과 휴대전화 통신 내역이 명백히 어긋나는데도 서둘러 수사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물증인 휴대전화 통신 내역을 바탕으로 증인을 조사하는 게 수사의 기본인데, 이 사건에서 경찰은 거꾸로 물증보다 황씨의 진술을 더 신뢰한 것이다.

물증보다 앞뒤 안 맞는 진술 신뢰한 경찰

숨진 박용철씨의 휴대전화 통신 내역에도 황씨와 연락을 주고받은 기록이 나왔다. 8월26일 황씨는 박용철씨에게 문자를 보냈고 다음 날 전화했다. 특히 사건 당일인 9월6일 새벽 0시55분 황씨는 박용철씨의 일반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냈다. 사건 현장에서 사라졌다는 의혹에 싸인 바로 그 휴대전화다. 사라진 휴대전화가 주목받는 이유는 ‘신동욱씨 재판’ 때문이다.

박근령씨의 남편 신동욱 공화당 총재는 박근혜·박지만 남매와 오랫동안 소송을 진행했다. 2007년에 벌어진 ‘육영재단 강탈 사건’ ‘중국 칭다오 납치 사건’을 당했다며 신씨가 박지만 EG 회장을 고소했다. 이에 박 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맞고소했다. 신씨는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2010년 기소돼 1년6개월 실형을 살았다. 법정에서 치열하게 다투던 신씨는 박용철씨를 재판 증인으로 여러 차례 불렀다.

2010년 9월1일 박용철씨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박지만 회장의) 정용희 비서실장이 나에게 ‘박지만 회장님 뜻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을 증인이 녹음한 테이프가 있다. …테이프라고 할 것도 없고 증인이 핸드폰에 녹음해둔 것을 핸드폰을 바꾸면서 캐나다에 가져다놓았다(6회 공판 조서 중 일부).”

신동욱씨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고 1년 후 박용철씨는 신씨 법정의 증인으로 다시 법정에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신동욱씨를 변론한 조성래 변호사는 “2011년 8월23일 박용철씨를 다음 기일 증인으로 신청했다. 그런데 9월6일 박씨가 살해되면서 법정에 설 수 없게 됐다”라고 말했다.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백 아무개씨는 사건 발생 다음 날부터 ‘박용철이 신동욱과 박지만 관련 재판과 관련해서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황선웅 등을 포함해 살인에 가담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뒀지만, 수사는 한 적이 없다. 황선웅 통화 내역은 조회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핵심 증인이었던 황선웅씨는 2012년 10월 서른여덟 살 나이로 숨졌다.

 

기자명 김은지.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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