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11일 일본 지바의 한 공원묘지에서 김동일 할머니의 49재가 열렸다. 필자는 김동일 할머니라고 하면 해바라기 꽃과 함께 손수 뜨개질한 꽃 달린 모자를 쓰고 샤니홀 로비에 앉아 천진한 미소를 짓던 모습이 떠오른다.

‘제주 4·3을 생각하는 모임 도쿄’는, 매년 4월 제주 4·3 위령제와 관련한 행사를 연다. 김동일 할머니는 늘 행사 시작 3시간 전부터 샤니홀에 와서 사람들을 맞았다. ‘천천히 오시지 그랬느냐’ 하면 “집에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랬던 김 할머니가 작년에 이어 올해 4월22일 행사에 오지 않았다. 특히 지난해 행사의 2부는 김동일 할머니의 4·3 체험과 심정을 모티브로 희생자를 기리는 공연이어서 더 아쉬웠다. 지난 4월23일 오후 김동일 할머니 부고를 들었다. 열흘 전부터 몸이 안 좋아 입원을 해야 하나 하던 중에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강정효 제공2008년 50년 만에 고향 제주를 방문해 4·3평화공원의 위패봉안실을 둘러보고 있는 김동일 할머니.

김동일은 1932년 제주도 조천에서 태어났다. 조천중학원 2학년, 열여섯 살 때 제주 4·3이 일어났다. 김동일에게 제주 4·3은 남북 분단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조천중학원 학생회장을 고문치사한 경찰에 저항하는 일의 연장이었다.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나라’를 세우자는 당시 제주도 분위기 속에서 김동일은 민주애국청년동맹에 가입해 조직의 말단 연락원 활동을 했다. 4·3이 일어난 후 김동일은 연락을 전하러 한라산에 올라갔다 내려오지 못했다. 중산간 마을이 다 불탔고 주민들을 해변 마을로 강제 이주시키는 소개령이 내려져 하산은 위험했다. 김동일은 중학교 세일러복에 ‘몸뻬’ 바지를 입고 5개월간 여기저기 좁은 동굴에서 숨어 지내다가 1949년 초 토벌대에 체포되었다.


민보단(경찰을 보조한다는 명목으로 전국에 걸쳐 조직된 우익 단체)은 체포된 김동일의 머리채를 잡고 ‘폭도년’이라고 손가락질해댔다. 그들은 김동일에게 함께 숨어 지내다 산에서 총살된 김옥희의 잘린 머리를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게 해야 한다고 패악을 부렸다. 김동일은 훗날 오사카에서 그 자리에 있었던 어떤 민보단원과 마주쳐 “저 이렇게 살아 있어요”라고 먼저 말을 걸었다. 잔혹한 ‘빨갱이’ 학살을 피하기 위한 처세였다는 것을 알기에 나쁜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를 보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고 한다.

제주경찰서에서 발가벗겨져 매질을 당하던 김동일은 100여 일 후 광주형무소로 옮겨져 짧은 옥고를 치렀다. 이후 지리산에서 다시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했다. 고향인 제주에서는 살 수 없기에 일본에 사는 제주 출신 남자와 결혼해 195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일은 빨갱이 낙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재일조선인 차별이 심한 일본에서 생활하기가 녹록지 않았다. 제주에 가볼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먹고살기에 바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자기 때문에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찍힌 친인척을 다시 힘들게 할까 봐 두려웠다.

항일운동을 했던 아버지와 없는 살림에 딸을 공부시키고 연락원 활동도 묵묵히 지켜봐준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타향에서도 당당하게 열심히 살았다. 제주 4·3으로 불효자식이 되었고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김동일은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김 할머니는 “오늘날 한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와 정의를 위해 싸웠다”라고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산에 올라간 이들의 죽음 헛되지 않게

2008년 3월31일 김동일은 제주 4·3 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재일동포 고향방문단으로 50년 만에 꿈에 그리던 고향 제주도 땅을 밟았다. 부모 묘소를 찾아 통곡했다. 제주 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소도 찾았다. 함께 잡혔다가 처형당한 김옥희의 이름을 찾았지만 그곳에 없었다. 김 할머니는 다시 눈물을 훔치며 그때 산에 올라간 이들의 죽음을 헛되게 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강정효 제공(왼쪽) ⓒ이령경 제공(오른쪽)2008년 4·3 60주기 위령제에 참석한 김동일 할머니(왼쪽 사진 오른쪽)가 강요배 화백을 만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른쪽은 김동일 할머니의 묘비. 아들이 어머니의 이름을 ‘東一’에서 ‘東日’로 바로잡았다.

2015년 할머니를 인터뷰한 이후 연락을 못한 게 죄송해 인터뷰에 동행했던 임흥순 감독과 함께 49재에 참석했다. 할머니가 미리 마련해두었다고 뿌듯해하던 묘의 앞쪽 대리석에 무궁화가 새겨져 있었다. 보통 일본에서는 가문의 문양을 새기거나 비워두는 경우가 많은데, 1993년 남편의 유골을 납골하면서 김 할머니는 무궁화를 새겨넣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묘비에 새겨진 김동일의 한자 이름이었다. 김동일의 이름은 한자로 ‘東日’이다. 그런데 1993년 묘비 건립 당시 새긴 한자는 ‘東一’이었다. 4·3 당시 조천면 호적부가 전부 불탄 후 재정비되면서 ‘東一’로 호적에 잘못 기재되었고, 이를 참고로 만든 일본의 외국인등록증 등 공문서에 그 한자 그대로 등록된 탓이다.

6월17일 김동일을 아버지 곁에 납골한 아들은 어머니의 이름을 ‘東日’로 바로잡아 묘비에 새겨넣었다. 49재를 마친 아들은 공원묘지 사무소에 1993년에 새긴 ‘一’도 ‘日’로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2003년 김동일을 인터뷰한 김창후는 〈자유를 찾아서-김동일의 억새와 해바라기의 세월〉(2008, 삼인)에서 조천공립국민학교 학적부에만 남아 있는 ‘東日’은 4·3이 낳은 역사의 흔적이자 상흔이라고 표현했다. 김동일의 4·3이 주목받은 이유는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된 뒤에도 여전히 침묵을 강요당한 기억과 4·3이 낳은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이산가족사 때문이었다. 김동일은 2003년 김창후와 한 인터뷰를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의 신문이나 NHK 특집방송 〈4·3의 진실〉, 제주MBC 다큐멘터리 〈산, 들, 바다의 노래〉 등에서 자신의 4·3 기억을 되살리며 이름을 바로잡았다. 그래서 묘비의 ‘日’자는, 4·3으로 뒤틀린 한자 이름을 4·3을 세상에 전하면서 바로잡은 김동일 자신의 ‘정명(正名)’이다.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적인 사과를 했는데도 여전히 4·3을 빨갱이들의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적지 않다. 2018년 제주 4·3이 70주년을 맞는다. 지난 6월1일 문재인 대통령은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수만명의 선량한 주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4·3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 등 국가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무고’하고 ‘선량한’이라는 말만으로는 여전히 남아 있는 빨갱이 낙인을 넘어설 수 없다. 제주 4·3평화공원에 누워 있는 백석을 무어라 ‘정명’해 일으켜 세울 것인가?

김동일은 산에 올랐던 이들의 삶을 기리기 위해 한라산 가득 해바라기를 심고 산기슭에 위령비를 세우고 싶다고 했다. 김동일의 영정사진에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적힌 글귀를 되새기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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