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임을 위한 행진곡 개사 요구했다”
  • 정희상 기자
  • 호수 512
  • 승인 2017.07.07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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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작가가 자서전 <수인>을 출간했다. 시대의 감옥에 갇혀, 분단의 감옥에 갇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살며 작가로서 지녀온 갈망과 위태로움을 담았다.

작가 황석영(75)의 삶은 한국 현대사를 다룬 대하소설이다.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난 그는 광복 후 귀국해 평양에서 살았다. 다섯 살 때인 1947년 부모 등에 업혀 월남했다. 4·19 혁명에 참여했다가 친구를 잃었다. 고교 재학 중 1962년 단편소설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객지> <장길산> 등 소설을 펴내며 민중문화운동도 벌였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5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 진실을 알리기 위해 총대를 멨다. 항쟁 참여자들과 함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펴냈다. 이 책은 입소문을 타며 팔려나갔고 ‘지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89년 북한을 방문했다가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장벽 붕괴를 목격했다. 1993년 귀국해 5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그는 최근 6·10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자서전 격인 <수인>을 펴냈다. 또 이재의·전용호와 함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보강해 증보판을 출간하기도 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또는 ‘황구라’로 통하는 황석영 작가를 만났다.

ⓒ시사IN 윤무영황석영 작가는 “수십 년 동안 광주 참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15년 이상 작가가 아닌 활동가로 살게 된 이유가 바로 광주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올해 자서전(자전)을 낸 이유는?


한국 사회가 그동안 사회·정치적 혼란기였고, 싸우고 투쟁하는 역사가 계속되었다. “전투하다 말고 한가하게 자기 이야기를 쓰나” 하는 소리 듣기 십상이어서 자전 쓰기를 주저했다. 그래서 한국은 문인들의 자전이 거의 없다. 출판사에서 “문학적 자산인데 함부로 팽개치지 말고 처음부터 제대로 쓰자” 해서 2014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제목을 <수인>으로 정한 까닭은?

‘자유의 길’이나 ‘자유를 찾아서’라는 제목을 생각하다가 역설적으로 <수인>으로 정했다.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살았다는 의미다. 사람은 태어나서 다 죽는다. 시간의 감옥에 갇혀 있다. 시대를 벗어날 수 없으니 시대의 감옥에 갇혀 산다. 나는 작가이므로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는 셈이다.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 그런 감옥에서 작가로서 지녀온 갈망과 위태로움을 담았다.

자서전에 1998년 석방 이후 20년의 삶은 빠졌는데?

1998년 석방된 뒤의 삶은 ‘세계와 나’에 해당한다. 내 책들이 해외에서도 나와 세계적인 활동을 하게 되고, 또 남북 관계를 잇기 위한 노력도 많이 했다. 그 대목도 썼는데 출판사나 아내 등 주변에서 아직 진행 중인데 다 쓸 필요 있냐고 말렸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자전을 보면 생의 3분의 2 분량을 담더라. 그 뒷부분은 사후에 다른 사람이 평전으로 쓴다.

전두환씨가 최근 자서전을 내서 5·18 관련성을 부인했는데?

사면을 어설프게 해놓으니 다시 역사를 뒤집는 저런 뻔뻔한 행위를 하는 거다. 전두환씨가 쿠데타를 안 했고 정권을 안 잡았다면 책임을 면할 수 있겠지만, 광주 참극 자체가 전두환 집권을 위한 것이었다. 계엄군을 내려보낸 최고 책임자도 전두환씨였다. 당연히 학살과 발포 책임을 모면할 수 없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전두환 시절 나온 책인데 정권이 시비 걸 만한 대목은 없었나?

1985년 초판이 나올 때만 해도 숨어서 증언을 채록하고 자료를 모으던 시절이었다. 그러다보니 일부 정확하지 않은 내용도 들어갔다. 이를테면 계엄군이 임신부를 찔러 태아를 꺼내서 버렸다는 증언이 초판에 들어 있었는데, 나중에 국회 청문회 등 조사를 거쳐 확인한 결과 임신부가 남편을 기다리다가 계엄군 총에 맞아 죽었다. 그 남편이 아내와 배 속의 죽은 태아를 묻어주면서 하늘나라 잘 가라고 비석을 세웠다. 또 최초 발포 상황도 바로잡았다. 초판에는 5월21일 도청 앞에서 낮 12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나자마자 약속한 듯 일제히 사격한 것을 최초 발포로 담았다. 그런데 조사 결과 광주역에서 하루 전날인 5월20일 밤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첫 발포를 했다. 이번 개정판에 이런 걸 다 바로잡았다.

5·18 문제 해결을 위한 남은 숙제는?

5·18 진상을 제대로 밝혀야 한다. 특히 헬기 기총 사격과 실종자를 찾아내는 문제가 남아 있다. 당시 외신 기자를 포함해 헬기에서 사격하는 것을 봤다는 증언이 많다. 물론 헬기에 달린 기관총을 쐈는지 아니면 헬기에 탑승한 계엄군의 실탄사격인지 그 차이는 규명이 안 됐지만, 공중 발포가 있었다는 건 틀림없다. 또 항쟁 당시 계엄군이 외곽에서 시위대를 사살하고 마음대로 묻었다가 발각되어 시신을 회수한 게 몇 차례 있다. 지금도 행방불명 신고자가 60여 명인데 이들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5·18 때 북한군이 내려와 참여했다는 등 광주항쟁을 왜곡 폄훼하는 범죄행위는 엄벌해야 한다.

ⓒ연합뉴스지난 5월11일 황석영 작가가 서울 프레스센터 내 외신기자클럽에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개정증보판 발행의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극우 세력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까닭을 뭐라고 보는가?


한국 정치에서 극우 보수한테 가장 큰 걸림돌이 5월 광주다. 광주를 어떻게든 변질시키려고 보수 세력이 총체적으로 공격한다. 5·18 유족회라든가 5·18 기념재단을 공격하고, 심지어 5·18 유공자 자녀에 대한 공무원 시험 가산점 제도를 과장 날조해서 공격해댔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함께 만든 광주 동지들이 2014년 모여서 다시 개정 증보판을 내기로 한 것도 이 같은 극우의 폄훼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서였다.

호남 출신도 아닌데 5·18 광주민주화운동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나?

<장길산>을 쓰는데 서울에서만 살다보니 농촌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농촌을 체험하려고 해남으로 내려가면서 광주와 인연을 맺었다. 거기서 호남 사람들이 받았던 핍박을 보게 되었고, 특히 광주항쟁을 통해 내 사고도 급진적으로 변했다. 내 문학, 내 생애에서 광주항쟁이야말로 굉장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평탄하던 팔자가 뒤엉클어졌다고나 할까. 이후 수십 년 동안 광주 참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15년 이상 작가가 아닌 활동가로 살게 된 이유가 바로 광주 때문이었다.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의 일부를 차용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사했는데?

9년 만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 기념행사에서 공식으로 제창되어 여한이 없다. 당초 책을 쓸 때는 이렇게 세상이 바뀌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수인>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개정판을 펴내고 한국을 떠날 생각이었다. 촛불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 저력으로 안 바뀔 줄 알았다. 촛불혁명 후 참회를 했다. 누가 그러더라. ‘최순실 열사’가 나타났다고(웃음). 그동안 박정희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작동하고 있었는데, 최순실 열사가 한 방에 보냈다고.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어떻게 보나?


예술인은 비판적 시각을 가져야 새로운 걸 말하고 그려낼 수 있다. 작가를 한다는 건 바로 체제나 제도에 비판적이고, 늘 비판적 생각으로 좀 더 나은 쪽으로 충고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작가의 사회적 기능 자체가 비판인데 그거 하지 말라면 예술하지 말라는 거다. 대개 문단도 그렇고 다른 예술도 그렇지만 소위 정부와 가까운 이들의 글은 서점에도 별로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 위주로 우파라 해서 지원하고, 정권 쪽 말 안 듣고 비판적인 시인이나 소설가는 다 좌파라 해서 제외시키자는 게 블랙리스트다.

블랙리스트를 감지했나?


내가 블랙리스트 조짐을 맨 처음 알게 된 거는 이명박 정부 말기였다. 문체부 출입하는 국정원 직원이 나를 만나자고 하더라. 그는 염려된다며 이렇게 충고했다. “선생님이 정부를 자꾸 비판하시면 옛날하고 달리 요즘엔 망신 주는 걸로, 굉장히 욕을 먹이는 분위기니까 선생님 자제하십시오.” 협박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염려하는 것으로 넘겼다. 공교롭게 그때부터 극우 세력이 나에 대해 빨갱이니 간첩이니 공격하기 시작했다. 원세훈 원장 체제의 국정원이 치밀하게 개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어땠나?

2014년 6월 작가회의에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비판 성명을 냈다. 내가 현장에서 읽고 기자들 질문에 신랄하게 답했다. 이틀 뒤 청와대 인사들한테서 연락이 왔다. 고등학교 후배들인데 “왜 그런 걸 하느냐. 형님과 뭘 좀 해보려 저쪽에서 그러는데 왜 자꾸 그러냐”라고 했다. 뭘 하고 싶다는 거냐 물었더니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개사하고 싶다, 가사 바꾸고 싶다는 제목으로 글을 하나 써달라”고 하더라. 내가 성질을 팍 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 가사를 내가 쓴 것도 아니고, 전국에서 부르게 된 지 30년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내가 개사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우습거니와 개사가 가능한 일이냐. 임을 위한 행진곡은 누구의 것도 아닌 역사 그 자체다”라고 했다.

또 다른 제안도 있었나?


일종의 협박과 회유인데, “황 선생의 꿈이 남북 관계 개선 아니냐”라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위원장으로 있는 통일위원회에 들어와 부위원장 역할을 맡아주면 어떻겠냐”라고 제의하더라. 그래서 내가 “정부에 대북 관계 개선 의지가 정말 있는지도 의심스럽고, 이명박 정부 때도 알타이연합을 하겠다고 해서 믿고 도와주다가 망신을 당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와 맞서 싸워서 명분상으로도 협조할 수 없다”라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 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피해를 당했나?

그 일이 있고 나서 지금 기억나는 것만도 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두 편을 포함해 뮤지컬,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 다섯 가지 계약 추진 건이 줄줄이 흐지부지되었다. 몇 개 프로젝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지원해주기로 했다가 중단되었다. 내가 전화해서 항의했더니 “선생님, 저희는 정부기구로서 예술기구들하고 협의해 진행해야 하는데 선생님을 굉장히 꺼립니다. 선생님하고 하지 말랍니다”라고 알려주더라. 그뿐 아니라 지난해까지 내 주거래 은행 계좌를 검찰이 살펴보았다. 지난해 여름에도 계좌 추적을 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왜 그랬는지 어디다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너 들여다보고 있어”라고 겁주는 거지.

이명박 정부 때 망신당한 경험이란 뭔가?

남북문제를 동아시아 지역 문제로 가져가 포괄적으로 해결해보자는 게 알타이연합론이다. 유럽연합처럼 극동 시베리아 개발을 통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남북한을 포괄해서 우리도 알타이연합으로 가자는 거였다. ‘몽골에 남북한이 들어와 개발해달라’ ‘한국은 기술과 자본을 대고 북한은 노동력을 제공해 개발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있었던 논의인데, 이명박 정부가 해보겠다고 해서 급진전됐다. 내가 몽골 왔다 갔다 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과 중앙아시아 순방 같이 가고 이렇게 됐다. 이게 보도되자 진보 쪽에서는 ‘황석영은 변절자다’ 하고 욕먹고, 우파 쪽에서는 ‘트로이의 목마가 침투했다’고 하더라.

실제 남북한 사이에 추진된 일이 있었나?

내가 당시 김정일 위원장한테 편지를 썼다. 20장 정도 분량이었는데 10장은 김정일의 아버지 김일성 주석과 생전에 만나 나눈 이야기, 이어서 몽골 개발 건을 꺼내면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민족이 같이 살아야 하니 함께하자고 설득했다.

ⓒ연합뉴스1989년 5월2일 방북 중 김일성 북한 주석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정경모, 문익환, 김일성, 황석영, 유원호.

북한 반응은?


북에서 답장이 왔다. 당 중앙에서 편지를 다 같이 읽고 독해했다며 “장군님(김정일)께서 시행하라고 지시하셨다”라고 구두로 답변을 전해왔다. 북한은 그 증거로 몽골 주재 대사를 바꾸고 통보하겠다고 했는데 실제 대사 교체가 이뤄졌다. 2009년 12월 서울에서 한국, 몽골, 중앙아시아 5개국 인사들이 모여 경제·문화 협력에 관한 타당성을 검토하는 포럼을 가졌고, 2010년 8월에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초원문화제를 열고 그 자리에서 ‘알타이 문화·경제 연대’를 발족할 것을 합의했다. 당시 정정길 대통령비서실장도 참석했다. 그래서 북한도 호응해 대사를 바꾸고 문화·예술 전문가 150명을 보내 참가하겠다고 화답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기류가 바뀌었다.

왜 바뀌었나?

친미주의자 성향의 청와대 참모들 때문이었다. 미국 얘기를 그대로 들고 와서 청와대 의견인 것처럼 몰아가던 참모들에게 남북 대화 화해를 위한 노력이 눈엣가시였나 보더라. 그 무렵 몽골 외무장관이 평양에 냉동공장을 짓는 협력사업차 방북한 걸 트집 잡았다. “우리가 북한을 제재 중인데 몽골이 북한을 방문해서 중요한 경제협약 하고 그러냐. 유감이다.” 이런 식으로 트집을 잡았다. 청와대에서 나를 만나자고 하더니, 울란바토르 초원문화제에 북한을 아예 빼고 추진하자고 했다. 지금 남북 화해 때문에 이걸 추진하는데 그러면 내가 빠지겠다고 통보했다. 그때부터 이명박 정권이 날 공격하더라.

이명박 정부한테 속았다고 보는가, 본인이 순진했다고 보나?

누가 이 프로젝트(알타이연합)를 싫어했을까 생각하니 중국과 미국이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추진하는 유라시아경제연합,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도 알타이연합과 비슷한 거대 프로젝트다. 지금 이 프로젝트는 역량 있는 정부가 국민에게 호소해서 국가적 과제로 추진해야 한다는 게 조금 늦었지만 내 소신이다. 우리는 대륙으로 가야 한다.

북한 때문에 극우 세력에게 늘 공격받았다. 황석영에게 북한은 무엇인가?

지금도 과감하게 말할 수 있는 게 북한은 또 다른 내 ‘자아’다. 방북을 결심하고 온갖 험난한 과정을 겪었는데 그때 든 생각이 ‘나와 타자’였다. 타자는 중국, 미국 등이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북한에는 양가의 감정이 있다. 현재 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지켜보면서 북한은 군사 파시즘, 군사독재의 시대로 들어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길고 긴 외세 봉쇄에 의해 농성 체제를 오래 하다보니까 그 농성을 유지하기 위한 통제와 독재가 현재 군사 파시즘으로 진행되고 있는 거다.

직접 만났던 김일성 주석에 대한 인상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내게 했다. “전 지구가 변했는데, 우리(북한)가 지상에 발을 대고 있는 한, 구름 위에 살지 않는 한 우리도 변해야만 한다.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유럽 부르주아 국회 내 혁신정당(노동당) 수준으로 존재할 수만 있어도 나는 그런 통일을 지지한다”라고 하더라.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런 정도로 열린 자세로 협상하겠다는 이야기였는데, 안타깝게도 본인이 남북 협상을 해보지도 못하고 일찍 갔다.

올해 75세인데 언제까지 소설을 쓸 계획인가?

영국 여성 에이전트가 나더러 “당신 작품을 앞으로 15년은 더 팔게 계속 소설을 써달라”고 하더라. 원대한 계획인데 15년쯤 더 써보자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 작품들이 아마 황석영 문학의 절정, 클라이맥스가 될 수도 있다.

“한국 현대문학에서 시에 김수영이 있다면 산문에는 황석영이 있다”라는 평가를 받고 싶다고 말해왔는데?

김수영 시인은 한국 현대시를 세계문학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노력한 분이다. 내 고희 기념 연설에서 김수영 시인의 ‘현대식 교량’이라는 시를 낭송했다. 식민지의 오욕으로 지어진 다리에는 여러 가지 억압, 착취, 식민지 의미가 담겨 있고, 선배들이 그런 얘길 꺼내면 젊은이들은 왜 케케묵은 옛날 얘기를 하느냐 그러는데, 김수영 시인은 그들하고 세대적 갈등을 빚는 게 아니라 다리를 통해서 사랑을 배운다, 나는 과거 여러 가지 기억과 노력을 후대에 전하고 건네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 이런 소회를 시에 담았다.

황석영에게 문학이란 무엇인가?

현대 국가는 대개 왜곡된 근대화를 거친다지만 우리는 그게 더 심했다. 이념적 근원을 억압당했고 개발독재 시대에 작가는 자기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했으며, 한편으로 창작도 해야 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했다. 자기와 동시대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의 과정을 올바르게 바꾸려 노력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게 한국 근현대 문학의 기본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식민지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선배들의 전통을 받았고, 내 시대를 살면서 문학적으로 또는 사회·정치적으로 책임지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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