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개방의 상징 미국도 알고 보면 꽤 보수적인 나라다. 수십 년 전에야 말해 뭐하랴. 서로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면서 안도하는 시대의 집들은 크기도, 색도, 전체적인 인상마저 비슷하게 설계됐다. 획일적인 분위기는 아이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49년 6월22일, 미국 뉴저지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소녀 메리도 수많은 얌전한 아이 중 한 명이었다.

메리는 주름진 얼굴로도 생동감 있는 젊음을 전달했던 할머니를 보며 외모와 내면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때부터였다. 연기의 매력을 실감한 것은. 예일 대학 드라마스쿨에 다니면서 현실적인 배역은 일부러 고르지 않았다. 3년 내내 “미친 연극”만 하면서 얼굴과 목소리를 마음껏 망쳤다. 이런 경험은 스스로가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변신하는 ‘악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이후 극단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메리 루이스 스트립이라는 본명 대신 메릴 스트립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연극 〈27 왜건〉 출연으로 1976년 토니상 후보에 오를 만큼 출중한 실력을 선보였다. 그 이후에도 내로라하는 유수의 시상식에서 수많은 상의 후보로 지명되며, 오직 자신만이 수상 기록을 깨나갈 수 있었다. ‘전설’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속도는 조금 더뎠다. 재빨리 메릴의 가능성을 알아채지 못한 탓이다. 그녀는 ‘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역을 잃어야 했다. 영화 〈킹콩〉 오디션 당시, “왜 나한테 이런 못생긴 걸 데려왔나?”라는 감독의 말은 오랫동안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타인의 평가에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배우로서 메릴은 “너무 못생긴 얼굴이 아닐까”라고 자책하곤 했다.


처연함이 가득한 눈빛에만 초점을 맞춘 비슷한 배역이 잇따라 들어왔다. 〈디어 헌터〉 〈맨해튼〉 그리고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을 안겨줬던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도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40대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 ‘마녀’ 역할이 주어졌다. 메릴은 “할리우드에서 (여배우가) 마흔 살이 되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됐다. 썩 기분이 좋지 않아서 마녀 역을 맡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녹록지 않은 현실이지만 그녀는 스스로 밝힌 배우로서의 본분, “다른 사람들의 삶에 들어가 관객들에게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주는” 데 충실했다. 물론 순응하지만은 않았다. 평면적이고 무성의한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재탄생시키는가 하면, 여배우의 낮은 출연료 인상을 요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가 작품 좀 줘요!”라는 짤막한 말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는데도 더 쉽게 소외되는 여배우의 현실을 꼬집고, 할리우드의 입소문을 만드는 비평가 집단 앞에 서서 여성이 비평가 그룹에서 여전히 소수라는 점을 비판한다.

존재 자체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라고 보여주는 배우

어쩌면 더 이상 ‘여배우’로서 주목받지 못할 시기인 50대에도 그녀는 〈디 아워스〉 〈엔젤스 인 아메리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맘마미아〉 등에서 연기의 깊이를 더해갔다. 남성 지배 사회에서 선명히 자신의 이름을 남긴 마거릿 대처로(〈철의 여인〉), 가족도 포기한 채 음악 외길을 걷는 로커로(〈어바웃 리키〉), 여성참정권 운동 지도자로 명연설을 선보이는 에멀린 팽크허스트로(〈서프러제트〉), 음치 소프라노이지만 음악에 대한 태도만은 누구보다 진지한 사람으로(〈플로렌스〉)…. 모두 메릴이 60대에 연기한 배역이다. 정당한 대우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한다고 느낄 때마다 ‘쟁취’하고자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남긴 족적은 개인의 영광으로 그치지 않는다. 흰 피부의 금발 여인에게 기대하는 흔한 그림을 곧잘 배신하며 자신의 영토를 넓혀온 대배우는, 그 존재 자체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후배들에게 전달한다. 필요할 때 문제를 제기하고, 그 상황을 개선하려고 애쓰는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니라는 점 역시 보여줬다. 남들과 비슷하게 보이고자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았던 어린 날의 소녀는, 찬찬히 여물어 전 세계의 딸들에게 새로운 참조점을 주는 거장이 되었다.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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