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으로 이 글을 시작하자. 수년 전 나는 우연히 들른 서울 종로구 내수동의 한 카페에서 윤여정의 옆 테이블에 앉아 그녀를 염탐하는 호사를 누린 적이 있다. 팬이라고 밝히며 사인을 부탁하기엔 쑥스럽고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기엔 상대가 너무 매혹적이었다. 혹여 눈이라도 마주쳐 흠모하는 속내가 들키면 어색해질까 두려워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탓에 그날 윤여정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가물가물해도 그녀가 입고 있던 하늘하늘한 스커트와 꼭 어울리는 파스텔톤의 캔버스화만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한국의 노년이 캔버스화를 신으면 보통 두 가지다. 자신이 아직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있노라 자랑하고픈 속내가 보이거나, 아니면 제 것이 아닌 옷을 걸친 어색함을 떨치지 못하거나. 윤여정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신던 신발을 신고 나온 생활인의 자연스러움과,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똑 떨어지는 패션 감각을 소화하는 법을 아는 스타의 화려함이 그 캔버스화에 집약되어 있었다. 그날 그 저녁의 카페에서, 나는 내 어머니뻘인 배우와 사랑에 빠졌다.

ⓒ이우일 그림
말하자면 윤여정은 여느 한국인들이 그렇듯 상투적으로 나이 먹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영원히 청춘으로 남겠어!” 따위의 치기 어린 마음으로 젊은이들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그들의 유행어나 패션을 어설프게 착취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김도훈 편집장과 인터뷰하면서 윤여정은 “분자요리, 싫어요. 음식 형태도 안 남아 있고, 네모, 세모 막 이렇게 조그맣게 주는 것도 별로다”라며 자신을 단호하게 “구식”이라고 수식했다. 자신이 공감하지 못하는데 무리해서 트렌드를 따라가다가 흉해지는 일 같은 건 없다. 윤여정의 젊음은 오히려 바람이 부는 방향과 무관하게 자신을 지키며 살아온 개인주의자의 그것에 가깝다. 살면서 굳이 타협할 필요가 없는 순간들에는 최대한 자신을 지키며 살아왔다. 이혼 후에는 생계를 위해 어떤 역할도 가리지 않고 연기해왔다고 회고한다. 그러면서도 본인의 인생관을 거스르는 작품은 아예 선택도 안 하느냐는 영화 저널리스트 백은하의 질문에 “잘할 수 없으니까. 못할 것 같은 건 안 해요”라고 딱 잘라 말한다. 물론 이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것들로 제 생을 채워온 개인주의자의 ‘생의 윤리’로 읽을 수도, 돈을 받은 만큼 최선을 다해야 하니 잘할 수 있는 것만 한다는 프로의 직업윤리로 읽을 수도 있다.

바람이 부는 방향과 무관하게 자신을 지키며 살아온 개인주의자

싫은 걸 마지못해 강요당하며 나이 먹은 이들은, 종종 자신이 겪은 강압이 삶의 당연한 이치라 착각하고 다음 세대에 그 강압을 물려준다. 윤여정은 그러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윤여정씨”라고 부른 자식뻘 되는 조연출에게 “누구누구 씨라고 부르는 게 법에 저촉되는 건 아니지만, 엄마 친구더러 윤여정씨라고 하는 건 좀 그렇죠?”라며, 제 불편함을 정중하지만 주저 없이 말한다. 이 일화에서 정말 중요한 건 “친숙하지 않은 사람이라 선뜻 선생님이란 말을 쓰는 게 익숙지 않아 그랬고, 자기 방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조연출의 말에 납득하고 그 후로 함께 낄낄거리며 같이 작업하는 동료가 되었다는 후일담이다. 자신의 세계가 무례하게 침범당하는 게 싫은 만큼, 타인에게도 존중받아 마땅한 세계가 오롯하게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노친네”라고 부르는 노희경과 친구로 지내고, “선생님은 밥을 잘 사줘서 좋다”라고 숨도 안 쉬고 답하는 고현정과 어울린다. 후배들에게 극진한 존경을 요구하지 않았기에, 은근한 사랑으로 곁에 있는 젊은 친구들을 얻었다.

2017년 6월19일은 윤여정이 만 70세가 되는 날이다. 세상이 강요하는 대로 나이 먹는 대신 자신을 지키며 살았고, 그런 자세로 남을 대했기에 젊은 친구들이 곁에 남았다. 사람 사는 건 누구나 다 비슷하니 세상은 모나지 않게 둥글게 살아야 한다는 뻔한 말에 치열하게 저항한 끝에, 윤여정은 70대에도 그 세월이 안 느껴질 만큼 모던한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 탁월한 개인주의자의 70대를 떨리는 마음으로 축하한다.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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