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9일 서른여섯 살 정미정씨는 검은색 철도노조 조끼를 입고 서울역 앞에 섰다. KTX를 타려는 시민들이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취재진은 두어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이들을 KTX로 돌려보낼 때가 되었습니다.” 기자회견문을 낭독하는 목소리와 탑승 안내 방송이 겹쳐 들렸다. 정씨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서울역을 오간 적이 있다. 그때는 노동조합 조끼가 아닌 진회색 유니폼을 입었다. 그녀는 해고된 KTX 여승무원이다.

ⓒ시사IN 신선영

13년 전인 2004년 4월1일 ‘꿈의 고속철’이라 불린 KTX가 개통했다. 개통 전 KTX 1기 여승무원 모집 공고가 떴다. 351명 모집에 젊은 여성 4600여 명이 몰렸다. 고등학교 졸업 이상 학력이면 지원할 수 있었지만 대학 졸업자가 절반 넘게 지원했다. 항공사 스튜어디스 경력자, 석사 학위 소지자, 해외 유학파 출신도 있었다. 당시 채용 홍보 영상은 ‘철도청 방침에 따라 계약직 사원으로 모집하지만, 1년 계약 후에는 여러 직급 체계를 조정해서 향후 정규직으로 전환, 약 5단계의 진급 단계를 계획한다. 복리후생은 현재 공무원 신분에서 적용받는 모든 분야가 다 제공된다’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철도청이 지금의 공기업이 아닌 국가기관이던 시절이었다. KTX는 철도청이 시행하는 ‘단군 이래 최대 국책사업’이었다.

 

ⓒ시사IN 신선영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 정미정 총무가 11년 만에 유니폼을 입어보고 있다. 정 총무는 2006년 5월 동료들과 함께 해고당했다.

대학 4학년 2학기, 항공사 승무원을 준비하던 스물세 살 정씨도 KTX 1기 여승무원 모집 공고를 봤다. ‘준공무원 대우’라는 문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1기인 만큼 자부심을 갖고 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도 민간 항공사 스튜어디스 대신 철도청이 운영하는 KTX의 승무원이 되려는 정씨를 격려했다. 국내 항공사와 외국 항공사의 스튜어디스, 그리고 KTX 여승무원 시험에 동시 지원했다. 정씨는 13.3대1의 경쟁률을 뚫고 KTX 여승무원이 되었다. 진행 중인 항공사 전형을 포기하고 ‘안정적인’ KTX 여승무원을 택했다. 정씨를 포함한 KTX 여승무원들은 ‘지상의 스튜어디스’ ‘고속철의 꽃’이라고 불리며 연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정씨는 정확히는 철도청 유관단체 홍익회(철도청에서 일하다 공상으로 퇴직한 직원이나 순직자의 유가족을 돕기 위해 설립된 재단법인)에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철도청이 2004년 3월 KTX 고객서비스 업무를 홍익회에 위탁하면서 여승무원들은 홍익회와 9개월짜리 근로계약을 맺었다. 2004년 말 홍익회에서 분리된 철도청 자회사 철도유통이 KTX 고객서비스 업무와 여승무원들의 고용을 넘겨받았다. 역시 1년짜리 계약직이었다. 계약은 모두 한꺼번에 모여 앉아서 서명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시사IN 포토2008년 8월27일 정미정 총무와 오미선 지부장 직무대행이 서울역 내에 있는 30m 높이의 조명철탑 위로 올라가 농성을 시작했다.

정씨는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입사 면접에 철도청 직원이 들어왔고 교육도 철도청에서 했다. 출무신고도 철도청 사무실에 했고 안전교육도 철도청 소속 열차팀장에게 받았다. 철도청 행사에도 종종 불려갔다. 여승무원들은 철도청장 학위수여식에 ‘꽃순이’로 불려가기도 했다. 2005년 철도청이 공기업인 한국철도공사(이하 코레일)로 전환되면 여승무원들도 같은 코레일 소속이 될 거라는 설명을 교육과정에서 수차례 들었다. 코레일 전환에 대비해 철도 관련 자격증을 딴 이들도 있었다. 사회 초년생이던 정씨와 여승무원들은 ‘언젠가는 코레일 소속이 되겠지’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약속과 달리 코레일이 출범한 2005년 이후에도 여승무원들은 여전히 위탁 계약직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노동조건이 점점 나빠졌다. 근무시간과 급여체계가 바뀌면서 여승무원 월급이 20만~30만원 줄었다. 코레일이 자회사 철도유통에 지급하는 도급비는 1인당 240여만원이었지만 정씨가 손에 쥐는 월급은 140여만원에 불과했다. 이후 입사한 2·3·4기는 130만원 이하로 월급이 더 줄었다. 근무 시에 사용하는 유니폼과 사물함 값을 월급에서 매달 떼어갔다. 명찰이나 카트를 바꿔달라고 해도 월급에서 깎였다. 여승무원들은 아플 때 쓰는 보건휴가를 순번제로 써야 했다. 9호차와 10호차 사이에 출입문이 없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열차 업무를 잘 모르는 이들이 여승무원들을 관리했다. 간부에 의한 성추행 사건이 불거지기도 했다.

여승무원들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왜 약속한 소속 전환이 되지 않는지, 코레일 소속 남성 열차팀장이 무전기로 여승무원에게 지시하고 함께 섞여 일하는데 왜 여승무원만 비정규직인지, 왜 관리 능력도 없는 철도유통이 중간에서 임금을 떼어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승무원들은 난생처음으로 노조 활동이라는 걸 시작했다. 2005년 12월 여승무원 393명은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에 가입했다. 코레일은 위탁업체를 다시 철도유통에서 KTX관광레저라는 자회사로 바꾸려 했고 여승무원들은 계약을 거부했다. 2006년 3월1일, 정씨 등 여승무원 370여 명은 ‘여승무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부산과 서울에서 파업에 들어갔다.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파업이라는 것에 참여한 스물다섯 살 정씨는 부산에서 파업 첫날부터 3일간 노숙을 했다. 춥고 딱딱한 바닥에서 자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침낭으로 겨우 버텼다. 사흘 뒤 철도노조의 다른 조합원들은 업무에 복귀했다. 하지만 여승무원들은 파업을 이어갔다. 코레일은 파업을 접고 들어오면 자회사 간부를 시켜주겠다고 회유했다. 제일 먼저 복귀해 간부가 된 동기도 있었다. 정씨는 혼자 살자고 동료들을 두고 빠질 수는 없었다. 그해 3월4일 부산에서 정씨를 포함한 100여 명이 서울로 올라왔다.


파업 한 달여째인 2006년 4월 국회 헌정기념관 농성 당시의 공포를 정씨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먹을 것도, 따뜻한 물도 끊긴 채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까맣게 무장한 경찰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방패로 바닥을 ‘쿵쿵’ 치는 소리가 건물에 울렸다.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뒤늦게 도착한 여경들이 정씨를 비롯한 여승무원들을 하나둘 끌어냈다. 어떻게 끌려나왔는지도 모르게 끌려나왔다. 그 이후 웬만한 건 무섭지 않았다. 다만 경찰들이 방패로 바닥을 치던 ‘쿵쿵’ 소리를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쳐진다. 그해 5월, 코레일은 새 자회사인 KTX관광레저에 복귀하지 않고 직접고용을 요구한 여승무원 280여 명을 해고했다.

‘역시 우리가 틀리지 않았구나’ 생각했는데…

그렇게 3일 파업은 ‘3년 투쟁’이 되었다. 정씨를 포함한 여승무원들은 점거·삭발·단식·쇠사슬 투쟁으로 20대를 보냈다. 네 차례 점거 농성 때마다 공권력에 들려나갔다. 경찰서 유치장과 검찰을 들락거렸다. 머리띠를 두르고 낯선 민중가요를 불렀다. 청바지에 노조 조끼 차림이 일상이 되었다. 단식을 할 때는 생수통에 먹고 싶은 음식 목록을 빼곡히 적기도 했다. 여승무원들은 서울 용산역사 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 사무실 한쪽에서 합숙 생활을 이어갔다. 여승무원들은 어느덧 ‘투사’가 되어갔다.

 

싸움이 길어지면서 함께하던 이들이 급격히 줄었다. 여승무원 직접고용이라는 목표는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2007년 11월 여승무원들이 코레일 소속 역무계약직으로 입사하는 합의안이 나오면서 끝이 보이는 듯했다. 가족들에게 “곧 복직한다”라고 알린 승무원도 있었다. 이철 당시 코레일 사장이 이듬해 1월 사장직을 사퇴하면서 이 합의안은 무산됐다. 조합원 100여 명이 빠져나갔다. 2008년이 되자 더는 할 수 있는 투쟁이 없었다. 노조 총무를 맡은 정씨와 오미선 당시 지부장 직무대행이 서울역 내 30m 조명탑 위에 올라 고공 농성을 벌였다. 탑이 바람에 많이 흔들렸다. 높은 곳이라는 무서움보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해결이 안 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밑에서 지켜보는 이들도 애간장이 탔다.

 


‘마지노선’이라 여겼던 고공 농성도 소용없었다. 코레일은 또 다른 자회사 정규직을 제안했다. 여승무원들은 논의 끝에 이를 거부하기로 했다. 3년을 싸워 다시 자회사로 들어간다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처음 370여 명이던 파업 인원 가운데 끝까지 남은 34명이 ‘법대로 하자’던 코레일 말대로 법정 투쟁을 시작했다. 여승무원들은 고공 농성을 끝내고 내려왔다. 2008년 11월, 코레일을 상대로 근로자 지위보전 및 임금지급 소송을 냈다.

ⓒ시사IN 신선영2015년 9월14일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 노조원이 서울역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2010년 8월 서울중앙지법은 KTX 여승무원들이 코레일 노동자라고 판결했다. 여승무원들이 이긴 것이다. 부당해고이므로 복직 때까지 밀린 임금도 지급하라고 했다. 정씨와 여승무원들은 ‘역시 우리가 틀리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우리 다시 복직하면 유니폼은 우리끼리 디자인해서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 거 너무 이상해”라고 희망적인 농담도 했다. 서울중앙지법은, 형식적으로는 철도유통이 여승무원들을 고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코레일이 여승무원들에게서 노동을 제공받고 임금을 포함한 노동조건을 정했다고 봤다. 코레일과 여승무원들 사이에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성립한다고 인정했다. 코레일은 항소했지만 2011년 서울고등법원 역시 같은 판단을 내렸다. 법적 다툼을 벌이는 사이 많은 여승무원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정씨도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코레일은 상고했다. 대법원 판결은 좀처럼 나지 않았다. 사회가 거꾸로 돌아가는 분위기에 불안했지만 설마 판결이 뒤집히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4년 뒤인 2015년 2월26일 대법원. 여승무원들은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판결문 낭독을 들었다. 결과는 ‘파기환송’. 대법원은 여승무원들이 코레일 노동자라고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의 업무와 KTX 여승무원의 업무가 각각 안전 관련 업무와 고객서비스 업무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화재 등 이례적인 상황에서는 여승무원이 열차팀장 지시하에 안전 업무를 하지만 전체 업무에서 비중은 낮다고 했다. 또 철도유통(홍익회)이 독립적으로 KTX 승객서비스업을 하며 여승무원들을 독자적으로 관리·감독하고 인사권을 행사했기에 코레일과 여승무원들 사이에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성립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1·2심과 전혀 다른 판단이었다(〈시사IN〉 제426호 ‘법은 멀고 생활고는 가깝다’ 기사 참조). 동료들이 하나둘 울기 시작했다. 정씨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 직후 총회가 열렸다. 거의 전원이 참석했다. 정씨는 간부로서 희망을 주는 이야길 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재판 결과만 공유하고 밥을 먹고 헤어졌다. 여승무원들의 속이 곪아갔다. 왜 이 시간까지 싸웠는지 후회되기도 했다. 당장 돈 문제가 닥쳤다. 1·2심 소송에서 이긴 KTX 여승무원들은 과거 4년간 고용된 것으로 인정돼 코레일로부터 임금과 소송비용을 받았다. 1인당 8640만원. 재판에 졌으니 이 돈을 토해내야 한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대법원 판결 얼마 뒤 정미정씨는 함께 싸우던 동료 박 아무개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없는 번호라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이상한 느낌에 가족에게 연락하니 “○○는 이제 여기 없으니까 연락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박씨가 가족과 함께 살던 충남 아산시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는 얘기는 한참 뒤에 들었다. 세 살 난 딸과 남편이 잠든 새벽이었다. 숨진 박씨는 대법원 판결 뒤 몇 날 며칠을 밥도 잘 먹지 않고 울다가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한다. 코레일이 반환 청구한 8640만원과 이자는 빚이 되어 박씨의 가족에게 상속됐다(〈시사IN〉 제408호 ‘빚만 남기고 떠나서 미안하다, 아가’ 기사 참조). 박씨의 딸은 처음 얼마간은 담담히 지내다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엄마를 찾는다고 했다.

박씨도 정씨처럼 1기 KTX 여승무원이었다. 정씨보다 한 살 많은 언니였다. 부산에서 일하던 두 사람은 파업할 때 만나 친해졌다. 정씨의 20대는 코레일과 싸우면서도 박씨를 비롯한 또래 친구들과 함께 웃고 부대끼며 추억을 쌓은 ‘애증의’ 시기였다. 박씨가 결혼하고 충남에서 아이를 키우면서부터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정씨는 그녀가 있어서 파업 3년을 견딜 수 있었다. 파기환송된 사건은 고등법원으로 돌아가 2015년 11월 최종 패소했다. 여승무원들은 법정 싸움에서 졌다.

재판을 마치자마자 코레일은 채권자가 되어 여승무원들을 압박했다. 2016년 4월12일과 5월11일 두 차례에 걸쳐 코레일은 지난 4년간 여승무원들이 지급받은 임금이 부당이득이니 반환하라는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연 5% 이자가 책정됐다. 지난 1월3일 대전지방법원이 임금 반환을 독촉하는 지급명령서를 여승무원들에게 보냈다. 8640만원에 대해서 지급명령일로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15%의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 한 달에 108만원이다. 이자와 지연손해금 등을 합해 여승무원 1인당 빚이 1억원이 넘었다.

요즘 그들은 누가 초인종을 누르면 깜짝깜짝 놀란다. 법원 직원이 밤 10시 넘어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최악의 상황은 강제집행이다. 부모 집에 사는데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법률사무소에 묻고 다닌다. 이혼해야 하나라는 이야기도 오간다. 6월29일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과 관련한 2차 조정이 열린다.

ⓒ시사IN 신선영2015년 11월27일 서울고등법원이 해고된 KTX 승무원 34명에 대한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자 승무원들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2017년 현재 사회 전 분야 노동 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의 구분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구직자가 그 차이를 모르고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 소속과 고용 형태를 꼼꼼히 따진다. 안정성과 처우가 전혀 달라서다. 그러나 2004년의 사회 초년생들은 KTX를 타고 코레일을 위해 일하면서 소속은 홍익회(이후 철도유통)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해고된 여승무원들은 한창 파업하던 때보다 지금 공감해주는 시민이 더 많다고 느낀다.


“국가랑 싸우는 거라고, 정치 싸움이라고”

10년 전 KTX 여승무원 해고 사태는 그 후 펼쳐질 대한민국 비정규직 문제의 신호탄이었다. 코레일은 정부의 공무원 정원 억제 방침에 따른 건설교통부 권고로 승객서비스 업무를 외주화했다. 2017년 현재 KTX 승무원들은 코레일에게 승객 서비스를 위탁받은 자회사 코레일관광개발 소속이다. 이른바 ‘간접고용’이다. 간접고용은 철도뿐 아니라 사회 각 영역에 확산됐다. 위험한 업무가 외주화되면서 의사소통 문제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지난해 9월 지진으로 KTX가 연착된다는 사실을 전달받지 못해 숨진 선로 유지·보수 노동자 2명도 코레일 외주업체 소속이었다. 구의역 김군도 서울메트로에게서 스크린도어 정비업무를 외주 위탁받은 은성PSD 소속이었다. 사실상의 사용자인 원청업체들은 외주업체 직원들의 노동을 ‘값싸게’ 이용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내 직원이 아니다’라고 발뺌한다. KTX 해고 여승무원 옥유미씨(36)는 말했다. “우리가 외주 위탁 비정규직으로 처음 시작한 사례였잖아요. 이 문제가 이슈가 되어 우리를 직접 고용하면 다른 외주 위탁 비정규직 문제도 다 드러나게 되니 절대 안 될 거라고 주변에서 말했어요. 국가랑 싸우는 거라고, 정치 싸움이라고.”

KTX 해고 승무원들이 싸운 ‘간접고용’은 노동 현장에서 노동의 실체를 지운다. 권두섭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장)는 “간접고용으로 사용자가 사라지면 노동법이 형해화(形骸化)된다. 법만 있지 법을 실제로 적용할 대상은 없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사용자 책임을 피하면서 임금 등 노동조건은 열악하게 고용하는 편의적 방편으로 간접고용이 계속 활용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과 관련해 여승무원들을 대리하는 권 변호사는 “코레일의 가장 핵심적이고 상시적·지속적 업무인 안전과 서비스 업무를 승무원들이 수행한다. 코레일은 당연히 이들을 직접고용해서 사업에 따른 이윤만 취할 게 아니라 고용 문제에 대한 책임도 같이 지면서 사업을 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코레일은 해고된 여승무원에 대한 입장을 묻는 〈시사IN〉의 질의에 “KTX 해고 승무원은 철도유통(홍익회)이 채용하고 해고했으므로 ‘복직’ 여부는 철도유통이 결정할 문제다. 코레일은 승무원을 채용하거나 해고한 바 없으므로 ‘복직’이라는 표현은 성립할 수 없고, 철도유통이 해고한 이들을 코레일이 직원으로 채용할 계획도 없다. 환수금은 청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철회 계획도 없다”라고 답했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화두로 떠오른 2017년 6월, KTX 해고 여승무원들은 다시 거리에 섰다. 매주 서울역과 부산역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간다.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대책위원회도 다시 꾸려졌다. 12년째 싸우는 동안 옛 유니폼에 달린 명찰은 녹이 슬었지만 이들은 복직의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열차팀장은 안전을, 여승무원은 서비스를 담당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계속해서 알려갈 작정이다.

네 살 딸아이를 키우는 최정현씨(37) 역시 해고된 KTX 1기 여승무원이다. 최씨는 세상을 떠난 동료 박씨를 위해서라도 싸움을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정당성이 증명이 안 되면, 아이가 커서 봤을 때 엄마가 어떤 억지를 쓰다가 죽은 거고 억울해서 죽은 게 아닌 게 되잖아요. 누군가가 잘못해서 엄마가 억울하게 죽었지만, 엄마는 정말 훌륭한 일을 했고, 엄마 친구들이 끝까지 싸워서 그 친구 딸이 나중에 정당한 대우를 받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시간이 더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정의는 승리하게 되어 있다고. 옳은 일만큼 더 큰 힘은 없잖아요.”

자신들이 싸워야 했던 비정규직 문제가 어느새 ‘당연한 노동 실태’가 되어버린 지금, 이들은 어떻게 목소리를 내고 싸워야 시민들이 관심을 보일지 궁리하고 있다. 해고 여승무원들은 “요즘은 삭발해도 사람들이 많이 안 보죠?”라고 기자에게 물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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