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과연 무엇을 아는 것일까. 이름? 개인사? 됨됨이? 고작 그 정도를 안다고 해서 감히 한 사람을 ‘안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글을 쓴다. 연극을 올리고 영화를 찍는다. 다 알기 위해서 더 알아가는 것. 더 알고 싶어서 다 알아내는 것. 전기(傳記)라 불리는 그것.


여기, 한 사람이 있다. 파블로 네루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우편배달부 마리오에게 은유의 마법을 가르쳐준 온화하고 인자한 시인이 그였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그가 픽션 바깥의 세상에서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의 시는 조금 알지만 그의 삶을 다는 알지 못하고, 그가 살다 간 생의 궤적을 일부 알아냈을 뿐 그가 살아낸 시대의 속살까지 전부 알아채지는 못했다. 〈네루다〉를 본 이유다.

영화는 ‘정치인 네루다’의 뒤통수에서 시작한다. 카메라가 상원의원 네루다(루이스 그네코)의 뒤를 따라가며 그가 보는 것을 관객도 보게 한다. “소련이라면 죽고 못 사는 공산주의자 오셨구먼.” 면전에서 비아냥거리는 동료 의원의 표정을 그가 볼 때 관객도 본다. “반역자 곤살레스 대통령은 국민을 개 취급하고 미국 앞잡이가 되어 나라를 팔아 드셨잖소!” 거친 언사로 맞받아친 뒤 문을 나서는 그를 따라 관객도 밖으로 나온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2차 대전이 끝나고 3년이 지난 지금 아름다운 내 조국 칠레에서 추격전이 벌어질 것이다.” 느닷없이 시작된 한 남자의 내레이션. ‘시인 네루다’ 곁에 모여든 좌파 예술인과 지식인과 정치인을 향해 조롱과 혐오를 늘어놓는 남자. 그의 말을 네루다는 듣지 못한다. 관객만 들을 수 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건 영화 시작하고 15분 뒤. “이제 내가 등장한다. 슬슬 얘길 써나가는 거야. 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이쯤에서 경찰이 등장해야 하거든.” 관객에게 스스로 정체를 밝힌 남자의 이름은 오스카(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해외로 도피하려는 네루다를 잡아오라며 대통령이 직접 임무를 맡긴 비밀경찰. 그때부터 관객은 오스카와 함께 네루다의 뒤를 쫓게 된다.

전기 영화에서 중요한 건, ‘누구’를 이야기하느냐가 아니다. ‘누가’ 이야기를 하느냐이다. 감독 파블로 라라인은 가상 인물 오스카를 화자로 내세워 실존 인물 네루다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실존 인물 네루다가 화자로 바뀌어 가상 인물 오스카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심하게 고르고 다듬은 캐릭터들

“(사랑이란) 그 사람에 대해서 남들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그래서 그 사람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것, 즉 그 사람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책 〈소설가의 일〉에서 작가 김연수가 한 말에 기대어 영화 〈네루다〉를 말하자면, 오스카는 네루다를 사랑했고 파블로 라라인은 오스카를 사랑했다. 그래서 각자 자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 결과, 나는 파블로 라라인을 몹시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눈으로 바라본 네루다의 세상에서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다. 시종일관 유령처럼 허공을 떠다니는 카메라, 밤공기처럼 슬며시 관객을 에워싸는 사운드, 시인이 시어(詩語)를 매만지듯 세심하게 고르고 다듬어 곳곳에 배치한 캐릭터,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마침내 눈 덮인 안데스 산맥을 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 시퀀스에 계속 붙들려 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정말 최고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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