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

몇 년 전 어느 봄날, 교실 앞 꽃밭을 보다가 기겁을 했다. 탐스럽게 핀 모란꽃을 2학년 아이 몇 명이 막대기로 후려치고 있었다. 이미 꽃송이들은 목이 잘려 바닥에 뒹굴었고, 잎이나 줄기마저 막대기에 잘려나갔다. 그러나 아이들은 막대기로 계속 후려치며 ‘얍! 얍!’ 기합까지 넣으면서 신이 났다. 기가 막혔다. 얼마 전에는 학교 뒤편에 막 돋아난 마늘 싹이 가득한 마늘밭을 잔디밭인 줄 착각하고 말처럼 뛰어다니면서 짓밟아놓았다. 물론 마늘밭 주인한테 손이야 발이야 빈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주인 덕분에 별 탈 없이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였다.


그 당시 근무하던 학교는 시골 학교지만, 도시에서 전학 온 학생들이 3분의 2 정도였다. 이런 일은 모두 도시에서 전학 온 학생들이 저질렀다. 당연히 나를 비롯한 많은 선생님들이 화가 났지만, 화만 낼 수는 없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원시시대 수렵 채취를 하던 때의 유전자가 있다. 꽃을 보면 따거나, 풀밭에 앉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풀을 쥐어뜯는 습성 따위가 그 예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전학 온 그 아이들도 수렵 채취 유전자가 발동해 막대기로 모란꽃을 후려친 것이라 이해했다.

우리 아이들은, 특히 도시의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식물들과 어울리며 관계 맺기를 잘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있지 않다. 수렵 채취 유전자를 순화시킬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학교나 가정이 그 기능을 다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하루 종일 교실에 앉아 공부하고, 학원에 가야 하고, 바깥에 나갔을 때 자연이 아닌 인공물의 수많은 위험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 그런 아이들의 몸속에는 수렵 채취 유전자가 꿈틀거리는데 그것을 다스리지 못해 여러 부작용이 생기는 건 아닐까?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도시에서 전학 온 1학년 아이가 운동장에서 개구리를 잡았다. 잡은 개구리를 빈 우유 곽에 넣어 교실 사물함에 보관했다. 집에 가져가서 키우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걸 본 친구는 개구리가 죽는다며 운동장에 풀어주라고 말했다. 그 친구는 시골이 고향이었다. 도시 친구는 집에 가져간다면서 끝까지 우겼고, 친구는 죽는다면서 풀어주라고 계속 말을 하다가 결국 싸움이 났다.

도시 아이들은 모란꽃이 피기까지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걸 잘 모른다. 마늘 싹이 나서 자라면 그 마늘로 양념을 해 먹고, 돈을 번다는 사실을 모른다. 개구리도 애완견 키우듯 집에서 쉽게 키울 수 있다는 도시 아이들의 생각은 정말 순진하다. 이 모든 것은 ‘관계의 단절’에서 온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단절인 것이다. 수렵 채취 유전자가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 맺기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수렵 채취 유전자를 길들일 기회 필요

우리 아이들은 가정, 학교, 사회에서 수렵 채취의 유전자를 자연스럽게 다스릴 여건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제 4차 산업혁명이 교육 부문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언젠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사교육은 ‘비서형 인공지능 튜터’가 대신할 거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 전망대로라면 사람을 대신한 로봇 강사와 마주하면서 살아갈 아이들이 점점 차가운 로봇을 닮아갈까 두렵다. 학교 도서관에서 인공지능 로봇이 아이들과 대화를 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수렵 채취 유전자의 왜곡은 더 심해져 신체적·정신적으로 여러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을까?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인간에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사랑, 연대, 협력, 정의, 평화 등이다. 교육의 역할은 바로 이런 걸 옹호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것들이 수렵 채취 유전자를 아름답게 길들일 수 있지 않을까?

기자명 이중현 (남양주시 조안초등학교 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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