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응징하는 사회
  • 문정우 기자
  • 호수 506
  • 승인 2017.05.31 18:0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신은 사랑하는 자녀가 성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교육에는 양면성이 있는데, 훈육과 지지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지식과 규범을 가르치며 변화를 꾀하기도 하지만 잘났든 못났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아이가 자긍심을 잃지 않도록 애쓰기도 한다. 이 두 가지 면은 종종 서로 충돌하는데 아이가 특별한 경우 부모는 더 큰 혼란에 빠진다. 다름을 응징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차이를 축복해야 하는가.

사회부 기자 초년생 시절에 트랜스젠더(정확하게 말하면 타고난 성을 남자에서 여자로 바꾼 트랜스우먼)를 깊이 있게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벌써 30년 가까이 지난 일이고 그때만 해도 트랜스젠더(성전환자)와 게이(동성애자)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조차 드물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트랜스젠더라는 용어조차 몰랐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들을 정신이상자이거나 변태성욕자쯤으로 생각하고 접근했다. 선정적인 기사라도 한 건 건져보겠다는 얄팍한 계산이 있었던 내게 그들은 뜻밖에도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주었다.

영화에서 종종 연쇄살인범으로 등장하기도 하는 그들은 부드럽고 상냥하고 예술가 기질이 다분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한참 같이 있으면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 기자의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한 천생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전혀 이상하거나 특별하지 않았다. 좁디좁은 자취방을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가수나 배우의 사진으로 도배하고, 남자 친구에게 국수를 비벼줄 때 행복하다는 보통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대부분 가정에서 추방당했고, 게이 바에서 접대부나 무용수로 일하는 외에는 변변한 직장조차 가질 수 없었다. 그때 나는 그들이 유럽을 떠돌던 유태인이나 집시 같은 ‘소수민족’을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의 잘못 탓이 아니라 그저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로 불행과 고통을 강요받는 억울한 영혼들이었다. 다름을 인정하거나 최소한 묵인이라도 하기는커녕 철저하게 짓밟거나 무시하는 데에 익숙해진 우리 사회의 잔혹한 일면도 보았다.

그들은 가족 얘기만 하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와 ‘오빠’가 특히 그들에게 잔인하게 굴었다. 그들이 혹시라도 이웃이나 친척 눈에 띌까봐 집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혹여 집에서 마주치면 폭언과 폭행을 퍼붓기 일쑤였다. 어머니만 몰래 그들의 자취방을 드나들었다. 어머니나 ‘여자 형제’조차 발길을 끊은 경우에 울음은 더 구슬프고 길었다. 어떤 친구는 ‘살인죄를 저지른들 이보다 더 모질게 굴겠냐’고 탄식했다. 가족이 이럴진대 남과 이 사회 전체가 이들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을지 생각하며 몸서리를 쳤던 기억이 난다.

그 종의 상태만 보더라도 전체 생태계의 건강성을 진단할 수 있는 동식물을 깃대종이라고 하는데 성 소수자야말로 그 사회의 깃대종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성 소수자를 핍박하는 사회의 인권은 거의 예외 없이 바닥 수준이다. 성 소수자의 상태는 양성 평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 소수자 가운데 태어날 때는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남성이란 브랜드를 받았지만 스스로 지각이 생기고 난 뒤에는 여성으로 불리고 싶어 하는 이들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많다. 그래서 남존여비 의식이 강한 사회일수록 성 소수자에 대한 반감도 큰 것으로 추정된다. 귀족 사회가 이탈자에게 유난히 혹독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남자라는 존귀한 신분을 버리고 굳이 비천한 여자가 되겠다는 걸 가족이나 사회가 용납하기 힘든 것이다.

2002년 <뉴요커>가 실시한 놀라운 설문조사 결과


2006년부터 세계경제포럼이 10년간 교육·건강·수입·수명 등 각 분야를 망라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양성 평등 석차는 전 세계 109개국 중 89위이다. 우리 인구의 반이 세계에서 거의 톱클래스로 불행하다는 얘기다. 우리 앞줄에는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같은 중동 밖 이슬람 국가들도 있다. 한국의 일부 남성 단체는 여성의 힘이 너무 강해서 숨이 막혀 견디기 힘든 모양이지만, 객관적 수치는 한참 거리가 멀다. 여성이 고통스럽다면 남성인들 평온할 수 있을까.

트랜스젠더를 취재하고 나서 어찌 보면 우리 모두가 소수자에 불과한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왜 아니겠는가.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결점투성이 존재이면서도 독특한 구석이 있다. 성 소수자에 대한 공격성이 높다면 다른 범주를 향한 적대감도 덩달아 커질 수밖에 없다. 성 소수자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라는 걸 그때 불현듯 자각했고 눈이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대통령 선거 후보 텔레비전 토론 때 홍준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동성애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걸 들으면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가 별로 변한 게 없다는 걸 실감했다. ‘센 척하려고’ 설거지를 안 한다고 했던 홍준표 후보가 느닷없이 문재인 후보에게 동성애에 찬성하느냐고 추궁했을 때 엉뚱하게 홍 후보의 자녀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분 자녀들 중 누군가 성 소수자였다면 눈물이 마를 날 없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맥없이 자녀들의 인권이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홍 후보는 애초에 우리 가계에는 성 소수자가 없고 가정교육도 엄격했으며 무엇보다 착실하게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동성애자가 나올 리 없었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어림없는 생각이다. 동성애는 가족력이나 교육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개인의 선택이나 질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운명에 가깝다. 찬성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문재인 후보의 답변도 마음에 차지는 않았다. 그는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말했다가 다시 동성혼 합법화에 반대한다고 수정했다. 하지만 동성애 차별에는 단호하게 반대한다고는 했다. 동성혼 합법화는 사실 동성애 차별 반대와 별개 문제가 아니다. 차별을 막기 위해 뒷받침돼야 할 법제화의 한 부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 논의는 한국 사회가 인권 선진국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기도 하다.

교회 표 이탈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아쉽다. 문 후보가 우리 사회도 이제 동성혼 합법화를 공개적으로 논의할 때가 됐다는 정도까지만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당락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큰 손해를 봤을까.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이 동성애 인권 문제에서 두 발짝 물러섰다고 꼬집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답답한 문제를 잘 풀어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갈수록 커져 더욱 진하게 미련이 남는다. 문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내내 성 소수자 문제에 먼지만 더 두껍게 쌓일까 걱정스럽다.

2002년 미국 시사 잡지 <뉴요커>는 부모들에게 그들의 자녀가 동성애자로서 자식을 키우며 배우자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이성애자로서 독신이나 혹은 아이 없이 배우자와 불행하게 살기를 바라는지 물은 일이 있었다. 응답자 세 명 중 한 명꼴로 후자를 택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문제에 대한 공개 논의가 오랫동안 이루어져온 미국 사회에서조차, 자녀가 행복하지만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보다는 불행하더라도 남들과 비슷하게 살기를 바라는 이들이 그토록 많은 것이다. 더구나 미국은 성경에 적힌 그대로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복음주의 교회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에 있는 나라이다. 아담과 이브가 아닌, 아담과 스티브가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회다. 그랬던 미국 사회에서도 2014년 6월부터 동성혼이 합법화됐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혼이 헌법에 부합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1966년까지만 해도 “하나님은 인종끼리 섞이는 걸 바라지 않으신다”라며 다른 인종 간의 결혼까지도 금지했던 바로 그 미국의 법원이 내렸다고는 믿기 힘든 결정이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이런 결정을 내린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성경은 이혼도 금지하는데 미국 사회의 이혼율은 45%에 육박하는 형편이다. 민망하게도 기독교 우파의 이혼율이 무신론자나 마르크시스트보다 더 높다. 동성 결혼의 불법을 고집하면 진보 진영이 이혼도 불법화하자고 덤빌까 봐 기독교 우파가 슬며시 물러서지 않았겠느냐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다. 2009년 <뉴욕타임스>가 생활수준이 비슷한 이성 커플과 동성 커플의 평생 비용을 계산해봤다. 동성 커플은 이성 커플보다 적게는 4만1000달러에서 많게는 46만7000달러나 많이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성애 커플이 이런저런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불평등한 상황인 것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혼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는 과학의 발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유전학은 동성동본 결혼 금지라는 오래된 믿음을 맥없이 무너뜨렸듯이 동성애에 대한 편견, 나아가서는 성에 대한 고정관념까지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중이다. 환경 영향 탓으로 짐작하지만 아직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유로 해가 갈수록 자폐 스펙트럼 장애와 더불어 성 정체성 장애도 주목할 정도로 늘어나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젊은이들의 성에 대한 의식이 혁명적으로 바뀌고 있다. 페이스북 프로필 난에 가입자들이 적어놓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표현한 용어가 50개가 넘는다.

이를테면 ‘다리 사이의 성’을 ‘귀 사이의 성’으로 바꾸려고 수술이나 호르몬 요법을 택한 이들을 트랜스섹슈얼이라고 부른다. 트랜스우먼이나 트랜스맨은 그냥 트랜스라고 축약한다. 양성인은 인터섹스, 이도 저도 아니면 젠더퀴어. 어느 날은 여성, 어느 날은 남성, 또 어느 날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면 젠더플루이드다. 트랜스젠더들은 트랜스젠더가 아닌 일반인, 즉 머글을 시스젠더라고 부른다. 라틴어에서 온 접두사 cis는 ‘이쪽의, 같은 편에 있는’이라는 뜻이다. 이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용어 해설 사전을 따로 만들어야 할 지경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성이란 남자거나 여자 혹은 암컷이거나 수컷이라고만 생각했다. 인간이나 동물 가운데서 예외가 발견되더라도 이런 이분법을 수정할 생각은 없었다. 극히 이례적으로 나타난 돌연변이거나 이상 현상이라고만 생각했다. 중·고등학교 생물 시간에도 인간의 성염색체는 X와 Y 두 개뿐이라고 배웠다. X와 X가 결합하면 여성, X와 Y가 결합하면 남성이 된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이 오래된 미신을 폐기할 때가 됐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은 성이 양극단이 아니라 스펙트럼상에 존재한다고 말해주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은 지구상의 사람 수만큼 다양하다. (제508호에 계속)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