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대학에 입학한 건 1988년. 그 전해에 일어난 6월 항쟁 비디오를 보는 건 학생회의 주요한 교육 프로그램 중 하나였지. 1987년 6월10일은 야당과 재야 운동단체가 총집결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개최하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리는 날이었어. 마침내 D-1의 날이 왔단다. 정문 앞에 나붙은 ‘결전 1일 전’. 더 이상은 이 정권과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이들의 각오가 그 획 하나하나에 담긴 듯 글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지. 내일. 내일이면 알게 될 것이다.
다음 날 6월10일 행사가 열릴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는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상당수 인사들이 잠입해 있었고 경찰이 성당에 군홧발을 들이밀지 않는 한 원천봉쇄 속에서도 그 깃발을 가냘프게나마 올릴 예정이었어. 허약함에 비해 이 행사를 맞이하는 전두환 정권은 막강했으나 그 이상으로 유치했다.
6만 경찰을 총동원한 것은 기본, 전국 대도시의 도심은 ‘안드로메다 군단’ 또는 로마 병정이라고 불리던 녹색 제복의 전경들로 홍수를 이뤘지. 당시 시위 지도부는 6월10일 당일, 시민들에게 국기 하강식에 맞춰 경적 시위를 해달라고 제안해두고 있었는데 이에 정부는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 회사 전화로 득달같이 전화를 돌린다. “경적기를 다 제거하시오. 이유 없소 다 빼시오.” 일반 승용차들은 어떻게 막았냐고? 경적을 울리면 경범죄로 5만원을 물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 검사들을 일선 경찰서에 배치하고 심지어 시위 현장에 나가서 진압을 독려할 것을 지시했으며, 도심의 고층 빌딩들에는 ‘학생들의 점거와 투신’을 예비한 대책 수립을 독촉했고, 데모에 참가할 것 같은 재야인사 수백명은 아예 집에서 한 발짝도 못 나오게 막았어. 그런 살벌한 6월9일이었다. 다음 날은 그들에게도 매우 중대한 날이었어.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가 선출되는 날이었거든. 만반의 준비를 끝낸 그들은 자신만만하게 얘기하고 있었어. “내일은 문제없어.”
6월9일 전국적으로 각 대학에서 ‘출정식’이 열렸어. 당시 아빠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청소 도구를 사러 나왔다가 학교 근처의 대학교로 올라가는 언덕길 어귀에서 한 대학생이 목이 쉬어라 외치고 있는 걸 보았어. 학교 정문은 까마득히 먼 언덕 위에 있었고 경찰들도 심심찮게 출몰하던 곳이었지만, 웬일인지 그는 핸드마이크를 홀로 들고 서 있었어. 그의 한마디는 아빠의 기억에 선연히 남았다. “이건 전두환이 죽느냐 우리 모두가 죽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누차 강조하던 내일. 그리고 내일.
“전두환이 죽느냐, 우리 모두가 죽느냐”
그리고 그날 서울의 대다수 대학에서도 6·10 대회 참가를 결의하고 기말고사를 거부하는 학생집회가 열렸어. 연세대학교에서도 그랬지. ‘국민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학생 2000여 명이 몰려들고 학내 집회가 끝난 후 교문으로 진출했어. 그들이 내건 플래카드의 내용은 이랬지. “4000만이 단결했다. 군부독재 각오하라.” 당연히 최루탄이 터졌고 학생들은 학교 안으로 후퇴했어. 그런데 그 와중에 한 학생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말았지.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이한열을 도서관학과 학생 이종창이 부축하면서 진압 경찰을 바라보던 순간을 잡은 사진기자가 있었어. 로이터 통신 정태원 기자였지. 그러나 그 사진이 한국 현대사에서 지대한 의미를 획득한 건 로이터보다는 국내 언론에서였어.
그날 이창성 당시 〈중앙일보〉 사진부장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어. 자기 회사 기자들의 사진을 훑어봤는데 그다지 좋은 사진이 없었던 거지. 그는 로이터 통신에 사진 협조를 의뢰했고 표준 렌즈로 찍은 작은 사진 하나를 받게 돼. 바로 이종창이 이한열을 부축하는 그 사진이었지.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친구를 부여잡고 전경들을 응시하는 안타까운 젊은이의 눈빛과 복면에 가려진 (최루탄을 조금이나마 막아보기 위한)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응시하던 이창성 부장은 순간 역사적 결단을 내린단다. 정부에서 신문사에 보도지침을 내리고 어떤 건 빼고 어떤 건 넣고 기사 크기와 사진 게재 유무까지 결정하던 시기였지.
“이 사진을 키워서 낸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보안대에 끌려가도 내가 끌려간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가 책상을 쳤을 때, 이한열의 사진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큰 언덕으로 솟아오르게 됐지.
‘최루탄을 맞은 연세대생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 연세대학교는 학교 전체가 들고일어섰어. 공수부대, 해병대 출신을 선두로 한 예비역들이 군복을 입고 ‘전략적인’ 시위에 나섰고 여행 동아리, 종교 동아리 등 운동권과 별반 관계없던, 오히려 배타적이던 이들까지도 세브란스 병원에서 밤새워 이한열의 병상을 지키게 돼.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 있었던 한 연세대 졸업생을 훗날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이런 말을 하더구나. “평생 처음으로 죽을 결심을 했어요. 그리고 전경이 들어오면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글거리는 잉걸불 같던 젊음들은 6월9일 밤과 6월10일 새벽을 두 눈 부릅뜨고 맞게 돼. “내일 두고 보자.”
6월9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사람 가운데에는 내무부 장관 고건도 있었다. 참여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치안 총책임자로서 6월9일 밤을 맞았지. 치안본부에서 밤을 새우며 상황을 주시하던 그에게도 당연히 이한열의 소식은 전달됐겠지.
그해 여름은 무척 더웠단다. 한낮의 뜨거운 기운은 밤이 되어도 수그러들지 않았어. 아니 되레 끓어오르고 있었지. 1987년 6월9일 대한민국에서 잠 못 이룬 사람들은 모두 역사의 무대에 올라 있었지. 그리고 목청 돋워 노래하다가 대합창을 하게 됐을 거야. 서로 다른 의미로. “내일이면 알게 되리 역사가 어디로 흐르는가를.” 다음 날 대통령 후보가 될 꿈에 부풀어 있던 노태우씨부터 성공회 성당에서 안절부절못하며 6월10일을 기다리던 사람들, 세브란스 병원에서 ‘한열아 한열아’ 부르짖던 연세대 그림패 동아리 학생들, 혹여 내일 보안대에 끌려가더라도 의연해야지 다짐했을 〈중앙일보〉 사진부장, 내무부 장관 고건, 그리고 내가 봤던 핸드마이크의 대학생까지. 그들 모두가 합창하고 있었어. “내일이면. 내일이면. One day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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