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 임지영 기자
  • 호수 507
  • 승인 2017.05.3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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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러 사람의 인생 행로가 바뀌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들에게 강남역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시사IN 신선영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를 맞이한 5월17일 저녁 추모제가 열렸다.

5월17일 저녁 7시.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 1000여 명이 서울 강남역 사거리를 가로질렀다. 곱창에 소주를 기울이던 넥타이 차림의 남성들이 잔을 멈추고 그들을 봤다. 철 만난 도다리회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던 젓가락질도 줄었다. 호프집 전단을 나눠주던 장년 여성도, 입을 가리고 웃던 교복 차림의 10대도 발을 멈추고 한곳을 바라봤다. 마스크를 쓴 그 검은색 옷 무리 손에 국화가 들려 있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 추모제에 모인 이들이다. 신논현역 앞에서 시작된 행진이 한 건물 앞에서 멈췄다. 1년 전 이곳에서 23세의 한 여성이 살해되었다. 범인은 노래방 화장실에 숨어 있던 김 아무개씨(35)였다. 김씨는 먼저 들어온 일곱 명의 남성을 그냥 보내고 이후 처음 들어온 여성을 살해했다. 김씨는 후에 경찰에서 ‘평소 여성들이 나를 무시했다’고 진술했다. 그날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는 추모객들이 붙인 형형색색의 붙임쪽지(포스트잇)로 덮였다.


당시 그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여성 세 명을 만났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인생의 행로가 바뀐 이들이다. 이 사건 직후 섬마을 여교사가 학부모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최근엔 새벽녘에 귀가하던 여자가 돌에 맞았다. 지난 1년, 변하지 않았고 동시에 모든 게 변했다.

■ ‘깨어보니 여기에 와 있다’

ⓒ시사IN 신선영엄세진씨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직장을 그만두었다. 엄씨는 직장에서 '고농축 성차별'을 겪었다고 말했다.

엄세진씨(26)는 2014년 여름, 대기업에 합격했다. 입사 첫날, ‘우리 회사는 여자에게 불이익이 있다. 알고 시작하라’는 말을 들었다. 한 달 내내 비슷한 이야기를 접했다. ‘우리 회사는 여자를 싫어한다’ ‘부서에서 남자를 받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등등. 엄씨는 오래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 나갈 수 없었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였고 경제적 자립이 중요했다. 복수하는 길은 유리천장을 뚫고 임원이 되어 조직을 바꾸는 거라고 생각했다.


점차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 직원들이 성매매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윙크나 성적 농담은 예사이고 상사가 수차례 어깨와 허벅지를 만졌다. 담당 부서에 성희롱 사실을 신고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변호사 조언을 받아 다시 문제를 제기하자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주변 사람들은 가해자를 두고 “한 가정의 가장인데 불쌍하지 않으냐”라고 말했다. 가해자는 어느새 “더럽게 예민한 부하 직원을 만나 처벌받은” 평범한 가장이 되었다. 아버지 역시 위로 대신 “네가 정의의 사도냐”라며 질책했다.

그러던 중 강남역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강남에 직장이 있던 엄씨는 일하다가 뉴스를 접했다. 직관으로 알았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사건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자신이 회사에서 겪고 있는 폭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에 본인이 당한 것처럼 화가 났다. 한동안 집 밖에 혼자 나가기가 두려웠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강남역에 모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에 매일 들러 한 시간씩 머물렀다.

당시 강남역 앞에선 자유발언대가 이어졌다. 추모하던 여성들이 마이크를 잡고 자신이 경험한 성차별·성폭력 경험을 털어놓았다. 엄씨는 사람들이 남긴 메모를 읽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며칠 뒤 신촌에서 열린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 나는 OO에 있었습니다’에 참가했다. 회사에서 받은 굴욕감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말하기였다. 적어간 종이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엄씨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강남역 살인사건 직후 ‘강남역 10번 출구’라는 페이스북 추모 페이지가 만들어진 것을 시작으로 젊은 페미니즘 그룹이 생겨났다. 이들은 여성혐오가 아니라 가해자가 앓고 있던 조현병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수사 당국의 태도에 저항하는 행진을 벌였다. 사건이 잠잠해진 이후에도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 박근혜 퇴진 집회 때 ‘페미니스트 존’ 설치 등 활동을 이어갔다. 엄씨도 그 과정을 함께했다. 짜릿한 경험이었다.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싶은 마음에 페미니즘 그룹 ‘강남역 10번 출구’의 문을 두드렸다. 차츰 여성운동을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때 후회할 것 같았다.

페미니즘 공부를 제대로 해보기로 했다. 회사를 ‘탈출’해 유학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지난해 10월 입학원서를 내고 3월 초 합격 소식을 받았다. 곧바로 사직서를 냈다. 다음 날 팀에 새로 여자 직원이 들어왔다. 첫날부터 인사팀 직원이 “여자는 담배 피우면 안 되고 짧은 치마 차림도 안 된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잠시 흔들렸다. ‘회사에 나 같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지난 3월, 여성의날 문화제 ‘페미답게 쭉쭉간다’ 행사 마지막 시간, 모두 한데 모여 춤추는 가운데 엄씨가 눈물을 쏟았다. 대학원 합격 소식을 들은 직후였고, 앞으로 이 일을 평생 하게 되겠구나 싶어 벅차올랐다. 순간적으로 흠칫 놀랄 때도 있다. ‘깨어보니 여기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이탈했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했지만 잘한 결정이라고 여겼다. 아버지도 많이 변했다. 가해 남성과 같은 시선에서 엄씨를 비난하던 아버지가 지난 1년을 지켜본 뒤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게 맞겠다”라고 했다. 눈물 흘리던 그날, 멀찌감치 떨어져 엄씨를 지켜보던 아버지가 한번 웃고 갔다.

엄씨는 “직장에서 ‘고농축 성차별’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해외에서 한국을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차별이 당연하지 않은 곳에서 인생 처음으로 꽃을 피우고 싶다”라는 바람이다.

■ ‘싸울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시사IN 신선영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방혜린씨는 지금 군인권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속도는 더디지만 세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생각한다.
방혜린씨(28)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던 날, 함께한 동기 130명 중 여자는 14명이었다. 애초 거창한 사명감으로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한 것은 아니었다. 원하는 다른 진로가 있었지만 부모의 반대가 심했다. 홍보차 고등학교를 방문한 해군사관생도의 입학 설명을 듣고 마음에 들었다. 학비도 들지 않고 바로 직업 군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관학교 생활은 즐거웠지만 자주 장벽을 느꼈다. 여자가 전교생의 10%였고 남성 위주의 분위기도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명예 남성’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졸업 후 해병대 소대장으로 근무할 때 부대 내 성 소수자 병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관리자로서 고민이 생겼다. 딱히 관련 지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연스레 성 소수자 인권 문제에도 관심이 생겼다. 여군으로서 한계를 실감하기도 했다. 군대 내 성폭력 예방 교육에서는 ‘(성평등) 감수성이 부족한’ 말들이 횡행했다. 전역하고 대학원에 진학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여성의 정치 참여를 주제로 연구하고 싶었다. 퇴근 후 강남역 근처 영어학원을 다니며 입시를 준비했다. 그때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방씨가 지난해 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은 날, 마침 자유발언대 첫날이었다. 속기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현장에서 피해 여성이 ‘나 대신 죽었다’는 걸 실감했다. 공부만 하고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전역했다. 엄세진씨와 비슷한 생각이 잠시 방씨를 붙들었다. ‘이 안에서 싸울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강남역 살인사건 이전, 그녀는 관찰자에 가까웠다. 이후로는 뭔가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지난해 10월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에 참여했다. 정부가 임신중절수술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밝힌 뒤였다.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 수백명이 모였다. 낙태라는 단일 이슈로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박근혜 퇴진 행동으로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을 때 광화문에 ‘페미니스트 존’을 운영하기도 했다. 정권 퇴진이라는 대의 앞에 꼭 페미니즘을 얘기해야 하느냐는 비판도 있었다. “같은 촛불을 들었는데 우리한테 왜 이럴까” 싶어 무섭기도 했다.

지난 1년, 방씨는 속도는 더디지만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조급하다. ‘갈리듯이’ 일하고 있는데 변화가 금세 찾아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통령 선거 후보자들의 입에서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나왔다. 관련 용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는 건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했다.

방씨가 군에서 전역하고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듯이, 당시 휴학하고, 졸업을 미루고, 직장을 그만두고 활동에 결합한 이들이 많다. 어딘가에서 조금씩 상처받고 불편했던 이들이 모여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한 연대를 경험했다. 방씨는 “흐름을 탄 이때가 아니면 언제 얘기하겠나. 우리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시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단시간 내 많은 일을 한 활동가 몇몇은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진로를 여성운동으로 정한 일부는 가정폭력 상담교육을 받고 있다. 방씨는 두 달 전 군인권센터에 활동가로 들어갔다. 군대와 강남역, 군인권센터로 이어지는 행보가 서로 무관하지 않다. 최근 불거진 동성애자 군인 색출 사건으로 바쁜 그녀가 인터뷰를 마친 후 서둘러 사무실로 향했다.

■ ‘미안해, 너 대신 살아남았어’

ⓒ시사IN 신선영대학생 김동희씨는 페미니스트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씨가 보기에 강남역 사건 이후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칭하는 여성이 늘었다.

대학생 김동희씨(22)는 강남역 살인사건 후 추모가 한창일 때 강남역에 세 번 갔다. 처음에는 대학 내 여성학회 회원들과 함께였다. 세미나를 하다 먼저 나와 혼자 강남역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술 취한 남성이 그녀의 팔을 붙들며 수작을 걸었다. 바로 옆, 눈물 흘리는 사람들과 이 남자의 간극에 대해 생각했다. 두 번째는 친구와 둘이서 갔다. 어떤 여자가 추모객들에게 소리쳤다. “저 남자가 문제지 왜 남자를 싸잡아서 욕하나?” 김씨가 돌아보니 여자가 말했다. “뭘 봐 ××년아.”


혼자 찾았을 때는 중무장을 하고 갔다. 마스크를 쓰고 모자도 쓰고 최대한 얼굴을 가렸다. 강남역에서 추모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 신상 정보를 캐고 욕하는 이들에게 당하는 피해 사례가 이어지고 있었다. 국화를 내려놓은 뒤, 잠시 쉬는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억울했다. 마스크와 모자를 벗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발생 당일의 기억은 생생하다. 새벽에 뉴스를 접하고 무서움이 밀려왔다. 자취 중이라 더 그랬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당시 남자친구와 다퉜다. 남자친구는 이 살인이 여성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사건이라는 김씨 생각에 동의했다. 하지만 김씨가 그렇게까지 두려워하는 걸 공감하지 못했다. 그녀는 혼자 밖에 나가지 못하는 등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다.

김씨는 그동안 비교적 안전한 삶을 산 것 같다고 말했다. ‘생각이 깨인’ 어머니 밑에서 차별받지 않고 컸지만 돌이켜보면 순간순간의 기억이 많다. 특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성희롱을 많이 당했다. 카드기에 카드를 꽂으면 그걸 보면서 “어디다 꽂는 거냐”라며 웃는 사람도 있었다. 고깃집에서 불판을 갈아주고 있는데 갑자기 손을 덥석 잡는 손님도 있었고, 꼬치구이 식당에서 일할 때는 “음식이 빨리 안 나와 (고기 대신) 바지를 벗고 올라갈 뻔했다”라고 농담을 건네는 이도 있었다. 소소한 게 너무 많아서 일일이 기억할 수조차 없다. 생계가 걸린 문제라 대거리할 수도 없었다. 버스에서 마주친 남자에게 스토킹당한 적도 있지만 편의점에 몸을 숨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온라인상에서 여성혐오성 글의 강도가 세졌다. ‘너도 강남역 피해자처럼 찔려 죽어봐야 정신 차리겠어?’ 이런 글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이 트라우마로 남았다.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현재 사회학으로 전과를 준비하고 있다. 관심은 역시 페미니즘이다. 학내 여성주의 학회가 하나였는데 지금은 4개로 늘었다. 얼마 전부터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기점으로 생겨난 페미니즘 그룹 ‘불꽃페미액션’에 합류해 ‘몸의 성정치’를 연구한다. 그녀가 보기에 강남역 사건 이후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명명하는 여성이 늘었다. 그 전에는 스스로의 불편함을 예민함으로 치부하고 끝냈다면 사건 이후 구조의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된 것 같다.

타이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나온 그녀가 1년 전 일기를 보여주었다. ‘여자라서 죽임을 당했어. 미안해. 너 대신 내가 살아남았어.’ 당시 강남역에 붙은 무수한 쪽지의 내용과 겹쳤다. 지난 1년의 동력은 무엇일까. 그녀는 말했다. “강남역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2017년 5월 강남역 10번 출구에 다시 쪽지가 붙었다. 엄세진씨와 김동희씨도 검은 옷을 입고 함께했다. 1주기 추모제에는 살인사건 피해 여성의 부모도 자리했다. 그들이 붙인 것으로 짐작되는 쪽지에는 ‘혼자서 무서움에 떨게 했어. 함께해주지 못해 미안해… 추모 행렬에 참가해준 모든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지난 4월 대법원은 범인 김씨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추모제 마지막 순서로 몇몇 여성이 지난 1년의 경험을 나눴다. 쪽지로 위로받고, 고립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참가자들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금세 잦아들었고 점점 커졌다. 한 취객이 무리에 다가가 훼방을 놓자 누군가 경찰에게 도움을 청했다. 대처가 능숙했다. “엄청 결사적이네.” 이들 옆을 지나던 한 여자가 역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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