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을 우울하게 만드는 제도
  • 조영선 (서울 영등포여고 교사)
  • 호수 505
  • 승인 2017.05.23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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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교사 성과급제가 시행되었다. 16년이 지난 지금 이 제도는 교사의 자존감을 깎아먹는 원흉이 되었다. 시장 경쟁 만능주의의 폐해다.

ⓒ김보경
2001년 처음 교사로 발령받았다. 꿈에 부푼 첫해 스승의 날, 아이들의 반짝반짝한 눈망울과 스승의 노래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은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날이었다. 뭘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려니 ‘안~돼요돼요돼요’ 하는 것 같고, 가만히 있자니 ‘부모의 숙제 제출’을 거부하기가 참 어려웠다. 오히려 김영란법이 생기고 나니 서로에게 명확한 기준이 생겨 후련했다. 스승의 날은 형식이 아니라 관계가 만드는 것이기에 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아이들은 편지를 쓰든, 하트를 그리든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래서 김영란법 때문에 교단이 쓸쓸하다는 것은 별 관심 없는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

오히려 올해 스승의 날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성과급이다. 교사가 되던 해부터, 정부는 ‘열심히 하는 교사’에게 인센티브를 주기 위해 스승의 날에 성과급을 지급한다고 했다. 교사 대부분이 반납 투쟁을 벌였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돈을 거부한다’는 집회도 열었다. 솔직히 초임 교사였던 나는 다른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들도 다 받는 성과급을 왜 거부하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16년이 지난 지금, 성과급은 교사로서의 자존감을 가장 깎아먹는 원흉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스승의 날을 우울하게 만드는 제도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것이 성과급 기준이다. 돈이 오고 가다 보니, 업무 평가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부지불식간 들게 된다. 그러다 보니 교사 스스로도 학생들을 만나는 노동을 객관적 기준으로 정하게 되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상담 지도’와 같은 항목이 있는데, 사실 상담의 영역이야말로 객관적인 기준을 정하기 어렵다. 그날 학생과 대화가 잘 되다 보면 길게 얘기할 수도 있고,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면 짧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상담이라는 영역의 특성상 기록에 남길 수 있는 것도 있고, 남길 수 없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성과급이라는 틀 안에서 생각하면 ‘몇 명’을 상담했는지, ‘얼마만큼 기록을 남겼는지’가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수업 시간’ 기준도 마찬가지다. 업무 특성이 다른 사서 교사나 보건 교사, 상담 교사의 경우 아무리 보정을 한다고 해도 낮은 등급을 면하기 어렵다. 그래서 위급한 학생을 위해 대기할 시간에 꾸역꾸역 수업에 들어가거나, 전문적인 상담이 필요한 학생을 제치고 교실에 들어가기도 한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교사의 노동은 분절되고, ‘눈에 보이는 것만 하면 끝’이라는 앙상한 서류만 남는다.

근본적으로 학생들과의 만남을 ‘성과’로 보는 것 자체가 황당하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학생들은 인간이 아니라 ‘교육 인적 자원’이다. 처음에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이름의 정부 부처가 생겼을 때, 학생들이 “우리 이제 석탄이에요? 아님 석유예요?”라고 키득거려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간 개개인으로 대접하며 인간답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가공해야 할 석탄이나 석유쯤으로 보고, 이를 잘 가공한 교사에게 ‘상’ 등급을, 그러지 못한 교사에게 ‘하’를 주는 것이다.

이런 성과급 제도는 과거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동거를 꿈꿨던 민주 정권에서 만든 것이다. 이후 16년 동안 국민들은 시장 경쟁 만능주의 제도의 한계를 뼈저리게 학습했다. 새로운 대한민국이라면 뒤틀린 ‘잃어버린 10년’만 되돌릴 것이 아니라, 예전에 잘못 뿌린 정책의 씨앗까지도 다시 파내야 할 것이다. 교사 성과급처럼 그 효과는 없고 폐해만 짙은 정책이라면 과감히 손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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