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사람들은 젓가락을 쓰지 않는다. 대신에 고기나 다른 음식을 덩이로 잘라 평평한 접시에 담아 먹을 사람 앞에 늘어놓으면, 오른손으로 호초(庖丁·칼)를 쥐고 잘게 썰어 왼손에 든 니쿠사시(肉刺·쇠스랑)로 꿰어 먹는다.”

‘모든 일본인의 스승’으로 불리며 1만 엔권에 새겨진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가 가타야마 준노스케라는 이명으로 1867년에 펴낸 소책자 〈서양 의식주(西洋衣食住)〉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영어와 네덜란드어에서 자유, 권리, 회의, 연설 같은 새 번역어를 건져낸 인물이지만 나이프나 포크 앞에서는 별수가 없어서 있는 말인 ‘호초’ ‘니쿠사시’를 확장하는 쪽을 택했다.

유신과 천황제가 떠오를 즈음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개화와 부국강병론으로 현대 일본의 설계도를 내놓았다. 그 주장이 담긴 〈서양사정〉 〈학문을 권함〉 〈문명론의 개략〉 등은 단박에 일본을 사로잡았다. 그의 주장은 게이오대학 설립, 〈지지신포(時事新報)〉 창간 등의 실험으로도 이어졌다. 하지만 아시아의 친구는 아니었다. 조선인과 중국인을 개돼지라 불렀고 청일전쟁 승리를 자랑스러워했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에 붙자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부르짖었다.
 

와세다대학 도서관 소장 〈서양 의식주〉 중에서. 이 자료는 현재 일본 국립 국회도서관, 게이오대학 도서관 등에도 소장되어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먹는 것도 실험했다. 1860년 스물일곱 나이로 처음 미국 땅을 밟은 후쿠자와 유키치는 1862년에는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러시아, 포르투갈을 방문했다. 1867년에는 생산력에서 이미 유럽을 압도하기 시작한 미국을 다시 방문해 다섯 달이나 머물다 귀국했다. 여행의 충격은 컸다. 열도와 아시아 밖 식생활을 접하면 접할수록, 서양식으로 잘 먹어야 문명개화에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강력한 군대는 잘 먹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여겼다. 그는 학문을 권한 만큼이나 육식과 우유를 열렬히 권장했다. 막 미국에 가서는 통돼지구이에 겁을 먹고, 버터 향을 못 견뎠지만, 글로는 우유를 넘어 버터·치즈·요구르트를 먹자고 부르짖고, 7세기 이래의 육식 금지령을 ‘천성을 알지 못하는 무학문맹의 허튼소리’로 몰아붙였다. 을러멜 뿐만 아니라 어르기도 했다. 그림으로, 차분한 해설로, 이국정조를 곁들여, 우선은 어르고 시작했다.

〈서양 의식주〉 ‘식생활 편(食之部)’을 펼치면 앞서 인용한 말과 함께 테이블이 나타난다. 테이블에는 ‘식사대(食事臺)’를, 식탁보인 테이블클로스(tablecloth)에는 ‘부물(敷物)’이라는 한자어를 붙였다. 테이블에는 생화를 꽂는 장식용 꽃병과 식탁용 조미료 통 묶음인 캐스터(caster)가 놓였다. 평평한 서양 접시인 플레이트(plate)를 중심으로 샴페인 글라스, 글라스, 테이블스푼, 포크, 나이프가 가지런하다.

오른쪽 맨 위에서부터 플레이트, 텀블러(tumbler), 테이블스푼, 포크, 나이프가 펼쳐진다. 장식용 생화를 꽃는 꽃병(花活·하나이케), 글라스, 샴페인 글라스를 지나면 커피와 차의 세계다. 다완과 받침이 한 벌을 이루는 ‘티 컵 앤드 소서(tea cup and saucer)’ 아래 티스푼, 식탁용 술병인 디캔터(decanter), 우유 또는 크림을 담는 밀크 포트(milk pot)가 보인다. 서양식 설탕통인 슈거 볼(sugar bowl), 앙증맞은 각설탕 집게인 통(tongs)도 보인다. 텀블러, 샴페인 글라스에서 플레이트를 지나 서양식 티 세트까지, 제대로 된 한 벌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어르기는 김옥균·박영효·유길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서양 의식주〉에 보이는 서양식 상차림 속 식기와 기물은 이후 조선의 그림 속에서도 재현된다. 1876년 이후 조선 왕실과 고위 관리는 이런 그림을 참조해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랬듯 샴페인, 커피, 홍차 그리고 작은 칼과 쇠스랑을 쓰는 식사에 금세 적응했다. 이 한 장면은 문명개화와 이국정조에 감염된 음식 문화사를 헤아릴 때에도 참고할 만한 자료이다.

기자명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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