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상담을 하게 된 건 A가 고등학교 1학년 3월 모의고사를 마친 때였다. A는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학원에서 ‘꼴찌’였다. 불안해서 잠을 못 잔다고 했다. 이 상담을 지금도 기억하는 건, 성적이 이 정도로 낮은 학생들은 강사를 피해 다닌다. 상담 요청도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기대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 때문에 학원 다니는 시늉만 한다. 그런데 A는 상담을 요청했다.
A는 과목별 점수가 40점대였다. 아이는 마치 당장이라도 대학에 떨어진 사람처럼 불안해했다. 나는 “괜찮아. 앞으로 잘하면 잘될 거야”라며 뻔한 위로를 건넸다.
아주 의례적인 위로였는데, 그 학생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첫 중간고사를 앞두고 A는 “평생 이렇게 열심히 해본 적 처음”이라며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했다. 중간고사 점수를 잘 받았다. 석차가 문제였다. A는 “점수가 잘 나와서 좋아하고 있었는데 석차가 안 나오니까 기분이 좀 안 좋아요”라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집에서 온종일 우는 아이를 보고 어머니는 전화를 걸어 “내신 점수 따기 너무 힘들 것 같은데… 전학을 보내는 게 나을까요?”라며 걱정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옆 친구 또한 열심히 하면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대평가 위주의 교육 환경에서 A는 깊은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뒤 A는 “대학 어디 가고 싶냐고요? 쌤 저 이 점수로는 대학 못 가요”라고 농담을 던졌다. “문제집이 꼴도 보기 싫어서 독서실 한구석에 그대로 모셔두고 있다”라며 수다도 떨었다. 한결 여유 있어 보였지만 늘 그렇지는 않았다. 또 한 번은 시험이 끝나고 상심해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아 어머니가 학원에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나는 ‘오답노트’라도 만들어보자는 구실로 집 앞까지 쫓아갔다. A는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된다”라며 거꾸로 날 위로했다. 그때 이 친구도 자포자기를 하나 싶었다.
학원에서 만나는 학생들 가운데 일찍 포기를 배운 친구들이 적지 않다. “공부머리는 타고나야 하는 것 같아요”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나 보죠” “뭐 대학 못 간다고 죽기야 하겠어요?” 겉으로 들으면 ‘자포자기의 말’인데, ‘방어의 말’로 이런 말을 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견디는 학생들이다.
점수 올라도 석차 안 올라 슬퍼하는 아이들
A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하루는 ‘숙제라도 해오라’고 다그쳤는데, 아이는 그걸 찰떡같이 “숙제라도 열심히 하면 성적이 오를 것이다”로 알아들었다. 누구에게 배워서라기보다 혼자 깨달았다. 친구 성적과 비교가 되면, ‘나는 원래 못하는 애였으니까 괜찮다’며 자신을 위로하며 견뎠다. 학원 강사들이 무심하게 던지는 말도 다 자기를 위한 충고로 받아들이면서 아이는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갔다. 견디는 것과 포기하는 것은 겉보기에는 같아도 결과는 달랐다.
아이는 지방의 한 사범대에 합격했다. 자기와 같은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합격증을 보여주며 “하니까 되네요. 신기하네요”라며 얼떨떨해하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느 날 밤에는 “항상 꼴찌였던 성적표를 책상에 붙여놓고, 시험 볼 때마다 내가 어디까지 올라왔는지만 생각하며 버텼어요. 저를 포기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해요”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이 문자는 과거의 A에게 현재의 자신이 보내는 감사의 인사다. 포기하지 않았기에 스스로 얻어낸 결과였다. 이것을 깨달은 아이는 평생의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그 깨달음을 자신이 앞으로 가르치게 될 제자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만 해도 A에게서 나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견디는 방법을 배웠다. A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포기하지 않아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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