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태의 시작은 국제인권법연구회 기획팀장인 A판사에 대한 행정처 요직인 기획조정실 심의관 발령이었다. 법원행정처가 국제인권법연구회 견제와 3월25일 학술대회 무산·축소를 위해 A판사를 영입했지만 그가 부당한 지시에 반발하며 사직서를 냈고 행정처가 만류해 지방법원으로 복귀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의혹은 판사 동향을 뒷조사한 비밀번호가 걸린 파일이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있다는, 블랙리스트 논란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진상조사위원회는 A판사의 진술을 배척하고, 사법행정권 남용에 참여한 B판사의 말을 믿었다. 법원행정처가 임의로 제출해준, 3월25일 학술대회 무산·축소 관련 2개 문건이 뒷조사 파일로 지칭되었고 다른 뒷조사 파일은 없다고 했다. 나는 이러한 결론의 진위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국민의 관심이 쏠린 판사 동향 파일의 존재 여부에 관한 조사로는 경솔한 결론이다. 관련자 진술이 완전히 다르고, 하드디스크 등 물적 자료 제공을 의혹의 대상인 법원행정처가 거부했다면 진상조사위원회는 “알 수 없었다”라고 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파일 조사도 안 하고 ‘블랙리스트 없다’ 결론
이번 사태의 가장 큰 발단은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연세대 법학연구원과 공동개최한 3월25일 학술대회다. 이 학술대회가 얼마나 우려스러웠는지, 대법원장을 빼면 가장 고위 법관들인 행정처장, 차장, 실장들은 B판사가 만든 2개의 대외비 대책 문건을 토대로 무산·축소 방안을 논의했다. 국제인권법연구회에 심각한 타격을 줄 조치인 ‘중복가입금지조치’도 실행했다. 2017년 2월 말 정기인사로 판사들이 다들 정신없을 때, 갑자기 중복가입금지 공지가 떴다. 전문분야 연구회 여러 곳에 중복 가입한 판사들이 대상이었다. 3월5일까지 연구회를 하나만 선택해 정리하지 않으면, 가장 먼저 가입한 연구회만 남기고 나중에 가입한 연구회들을 강제탈퇴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국제인권법연구회도 전문분야 연구회인데, 연구회들 중 가장 나중에 설립되었다. 중복가입금지 조치가 실행되면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 수가 급감할 것은 명약관화했다.
법원행정처가 10여 년 동안 사문화된 중복가입금지 조항을 갑자기 꺼내든 것은, 국제인권법연구회 견제를 위한 것이라는 의혹이 일었다. 중복금지 조치 자체의 불합리성에 대한 다수 판사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임종헌 전 차장은 고영한 행정처장,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보고한 후 그 시행을 ‘보류’했지만, 중복금지 조치 실행 배경을 밝히지 않았다. 진상조사위원회 조사로 이 조치가 지난 3월25일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대회를 무산·축소하고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축소를 노린 것이라는 게 밝혀졌다.
그렇다면 3월25일 학술대회는 도대체 무슨 내용을 다루었기에 법원행정처가 이렇게 기를 쓰고 막으려 했을까? 나는 3월25일 학술대회의 지정 토론자로 참석했다. 사법행정에 대한 내 관심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대법원의 상고법원과 이에 결합된 기만적인 사실심 충실화 방안에 반대했다. 이는 국민의 이익보다는 행정처와 고위 법관들의 이해에만 주로 부합했다. 대안으로 상고허가제와 법관을 2~3배 늘려 ‘5분 재판’을 ‘30분 재판’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사법행정의 민낯을 보았다. 제왕적 대법원장의 권한 분산과 비대화된 행정처 개혁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국민을 위한 재판 서비스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기는 불가능했다. 이후 나는 사법행정 개혁에 관해 목소리를 내왔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영장 기각 논란 당시에도 신뢰 확보를 위한 사법행정 개선안을 제시했다(〈시사IN〉 제492호 ‘이재용 영장 논란과 현직 판사의 제안’ 기고 참조).
학술대회 지정토론에서 나는 제왕적 대법원장 권한의 분산을 위한 5대 입법과제를 제안했다. 그 내용을 보면 행정처가 그토록 싫어한 이유가 드러난다. ‘상근판사 중심의 행정처 해체 및 재구성 법원조직법 개정안(전국단위)’은 비대화된 행정처 권한을 축소하자는 주장으로, 아마 법원행정처가 가장 싫어했을 것이다. 법원행정처에 집중된 사법행정권과 인사권은 미국 연방법관대표회의처럼 ‘전국단위 사법정책 최고 결정기관인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창설해 이양하자는 주장’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대법원장이 독점적 임명권을 가진 30여 개 법원장을 소속 법관들이 선거로 뽑게 하는 ‘법원장 호선제 법원조직법 개정안’도 나는 제안했다. ‘각 법원 판사회의 운영위원회의 선거를 통한 구성과 사무분담권 부여 주장’도 법원행정처로서는 뼈아플 수 있다. 영장, 부패(뇌물), 선거 기타 선호 사무분담 담당 재판부에 행정처 출신 법관들을 발탁해 배치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고등부장 승진제도 폐지를 위한 지방법원·고등법원 이원화를 법원조직법에 명문화하자’는 주장도 완성 직전의 이원화를 흔들고 있는 대법원장과 행정처로서는 싫었을 것이다. 이원화가 완성되면, 대법관으로 가는 관문인 고등법원 부장판사(차관 대우)를 지방법원 부장판사에서 발탁하는 식의 대법원장의 승진인사 권한은 사라진다.
오해하지 마시라. 제왕적 대법원장의 권한 분산과 비대화된 행정처 개혁은 개인을 향한 비난이 아니다. ‘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과 비대화된 행정처의 막강한 권한은 법관 사회의 심각한 관료화를 가져왔다.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나듯이, 보직·인사상 불이익의 가능성은 대법원장이나 행정처의 의중에 반하는 법관의 의사 표현을 막기 쉽다. 심지어 대법원 판결에 반하는 판결을 할 때조차 보직·인사상 불이익을 두려워할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서는 추가적인 성역 없는 진상조사가 필요하고, 그 이후에 책임져야 할 이들에 대한 징계 절차가 필요하다. 이것은 기본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제왕적 대법원장 권한 분산과 행정처 개혁을 위한 법원조직법 개정 등의 생산적 논의로 연결되어야 한다. 진상조사위원장인 이인복 전 대법관도 별도의 글을 법원 코트넷에 게시했다. 대법원과 행정처에 제도 개선의 지향점과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할 것을 주문했다. 법관 개인에게는 분장 업무의 상대적 차이에 초연하고, 사건의 경중을 떠나 재판 업무에 매진하라는 취지의 당부를 했다.
행정처 개혁은 사법 개혁의 선결조건
그럼 어떡하자는 것인가? 판사는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가? 아니다. 시민과 법관의 소통이 이상적인 사법 개혁의 원칙이라면 법관의 참여도 필요하다. 다만 ‘개혁 대상’인 행정처가 ‘개혁 주체’ 노릇을 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진상조사 과정에서 여러 법원 판사회의를 통해 판사들 의사를 대변할 대표를 다수 선출했다. 그 대표들이 일부 진상조사위원으로 선정되었고, 나머지 대표들이 협의체를 꾸려 진상조사위원회에 조사 범위·방법에 관한 의견을 줄기차게 내지 않았다면, 이번 진상조사 결과는 훨씬 초라했을 수 있다.
이 같은 경험을 고려하면, 법원 내 행정처 개혁은 판사회의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주도해야 한다. 30여 개 법원에서 선출된, 재판 경험이 풍부하고 사법행정에 관한 고민이 깊은 판사들이 전국법관대표회의를 구성해 거기서 행정처 개혁안을 논의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높아진 사법개혁 요구로 인해 이후 사법개혁 논의기구가 꾸려질 것이 예상된다. 민주화 이후 서너 차례의 규모 있는 사법 개혁 논의에서, 그러한 기구는 국무총리·대통령·국회·대법원장 소속 등 다양한 형태로 시도되었다. 이번 법원행정처 개혁을 중심으로 한 사법 개혁은 대통령이나 국회 산하로 꾸려질 개연성이 크다. 개혁의 대상에 가까운 행정처가 보좌하는 대법원장의 소속에 두는 것은 난센스이다. 다당제 구조가 계속되면, 국회 산하에 설치될 개연성이 크다. 사법 개혁 논의기구에 법학계·변호사단체·사회단체·정당 등 시민을 대표하는 이들의 참여는 중요하다. 다만 행정처 중심의 승진 구조로 인한 법관 관료화의 폐해를 몸소 느껴온 일선 법관들의 참여도 보장되어야 한다. 논의기구에 참여할 법관 수가 협의되면, 30여 개 법원 판사회의를 통해 뽑은 대표들로 전국법관대표회의를 구성해, 거기서 보낼 법관들을 정하면 된다. 과거처럼 법원 대표를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정하도록 하면 개혁은 무산될 위험이 크다. 혹은 행정처 상근 판사 수 일부 감축, 근무기간 제한이나 5·16 군사쿠데타 이전처럼 법원행정처장을 대법관이 아닌 지방법원장급이 맡도록 하는 식의 기만적인 타협안 정도에 그칠 것이다.
법원행정처 개혁은 구체적 재판제도 개선에 앞서 먼저 이뤄져야 한다. 재판제도 개선을 위한 다수의 사법 개혁 이슈들을 행정처 개혁 이슈와 합치는 경우 행정처 개혁의 초점이 흐려질 것은 자명하다. 아마 그것이 비대화된 행정처가 원하는 방식일 것이다. 국민 이익보다는 행정처 조직과 고위 법관들의 이익에 민감한 행정처 조직을 먼저 개혁해야 한다. 행정처 개혁이 국민을 위한 재판제도로 가는 획기적 개선의 선결조건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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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규 편집국장
187쪽 조사 보고서를 정독했다. 확정적인 표현은 거의 없었다. ‘집안일’이라 조심스럽게 접근한 듯 보였다. 행간을 읽어나갔다.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특별조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