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파키스탄은 민주화 혁명의 폭풍전야였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군부독재를 일삼아왔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빗발쳤다. 그때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취재했다(〈시사IN〉 제9호 ‘행동하는 양심 있어 행복한 파키스탄’ 기사 참조). 이듬해 8월 무샤라프 대통령은 사임했다. 8년10개월간의 통치가 막을 내렸다.

2017년, 파키스탄은 민주화가 이루어졌을까? 이슬라마바드 시내로 진입하자 예전에는 없던 거대한 빌딩과 쇼핑센터가 보였다. 서양식 커피숍과 브런치 카페가 거리 풍경을 달리 보이게 했다. 파키스탄에도 중국 자본이 많이 들어와 부동산 쪽이 호황이라고 한다. 이슬라마바드 인근 라왈핀디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아지즈 마디 씨(43)는 “외국인들의 투자 열기로 부동산 매물 값이 계속 오르고 신축 건물도 날로 늘어나고 있다. 지금이 부동산 투자 적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영미 제공2007년 11월8일 파키스탄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민들이 무샤라프 대통령의 독재를 비난하고 있다.
무샤라프는 더 이상 파키스탄에 없다. 그는 육군 참모총장으로 있던 1999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총리직에 있던 나와즈 샤리프를 밀어내고 2002년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권좌에 오른 무샤라프는 국민들의 자유와 민주화 요구를 짓밟았다. 정보국 직원들이 반정부 세력을 체포하고 감금하고 살해하기도 했다. 암흑의 시간이었다. 3선 연임에 도전하면서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2007년 11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법관을 해임·억류했다. 당시 야당 후보들이 참모총장을 겸직한 채 대선에 나선 무샤라프는 후보 자격이 없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일부 대법관들도 이에 동조할 기미를 보이자, 무샤라프는 군 병력을 동원해 이프티카르 초드리 대법원장을 강제로 법원 밖으로 끌어냈다. 또 대법원장과 판사들, 인권위원회 위원장들을 가택 연금했다. 임시헌법령(PCO)까지 선포했지만 국민들의 저항을 꺾을 수는 없었다. 먼저 변호사들이 거리 시위에 나서고 모든 재판 일정을 거부했다. 언론인도 시위에 나섰다. 국민도 동참해 전국적인 시위로 번졌다. 저항은 2008년 총선에서 야당의 압승으로 이어졌다. 그 뒤 무샤라프에 대한 탄핵이 추진되었다. 무샤라프는 2008년 8월 구속과 파면을 피하려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2013년 총선 때 정계 복귀를 노리며 일시 귀국했지만, 곧바로 반역죄 등 5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지금은 척추 질환 치료를 이유로 두바이에서 망명 중이다.

무샤라프가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쫓아냈던 나와즈 샤리프 총리는 다시 돌아와 현재 파키스탄 총리가 되었다. 파키스탄의 가장 큰 변화는 언론이다. 무샤라프 정권 때 파키스탄 언론은 군사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했다. 정부 견해를 대변하지 않는 기자들은 체포되었고 언론사는 강제로 폐쇄되었다. 무샤라프가 물러난 뒤 현재 파키스탄에는 민영 위성방송국 89곳, FM 라디오 방송국 115곳이 성황이다. 도시마다 프레스센터가 운영 중이다. 언론인 노조도 생겨서 언론인들의 권익과 안전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파키스탄 민영방송 아즈TV의 유명 앵커 인티사르 울하크 씨는 “10년 전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에 언론인들이 참여하며 국민적 공감을 얻었던 것이 가장 컸다. 이제는 정부와 정치인들이 언론인들을 불법 감금하거나 체포하는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파키스탄의 가장 큰 변화다”라고 말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정치 뉴스를 즐겨 읽는다.

ⓒEPA지난 2월23일 파키스탄 동부 펀자브 주 주도 라호르의 ‘디펜스 하우징 지역’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최소 9명이 숨지고 30여 명이 다쳤다.
그 덕분에 10년 전 소수 엘리트에게만 집중되었던 사회시스템이 이제는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춰 바뀌었다. 내무부 관리인 모하마드 샤피크 씨는 “국민 고충 처리 시스템을 구축하여 국민들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 예로 그는 최근 완성된 이슬라마바드 신호등 체계를 들었다. “무샤라프 시절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신호등 체계를 만들어 교통사고를 막자는 사업을 제안했다. 국민 안전에는 관심이 없어서 높은 사람들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최근 신호등 체계를 만들면서 교통사고도 줄었다”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 밖에도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변화가 많았다. 맘눈 후사인 대통령은 지난 3월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힌두 혼인법을 공포했다. 이 법은 파키스탄에 사는 힌두교 신자들의 혼인신고뿐 아니라 이혼 방법과 재산 분배, 재혼 등 혼인 생활 전반을 다룬 법이다. 2억 인구 가운데 97%가 이슬람교도인 파키스탄에서 그동안 힌두교도의 결혼은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힌두교 부부는 결혼해도 혼인신고를 할 수 없고 혼인 관계를 공식적으로 증명하는 서류를 관공서에서 발급받지 못했다. 결혼을 했지만 나라에서 부부로 인정받지 못한 힌두교 부부가 300만명 이상이나 된다. 나와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힌두교도 역시 다른 종교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파키스탄을 사랑한다. 이들에게 동등한 법적 보호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다”라고 말했다. 종교와 신분에 관계없이 국민들을 보호하는 게 파키스탄 정부의 책임이라는 것이다.테러가 파키스탄 민주화 발목 잡아10년 전에 비해 파키스탄은 분명 민주화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도 발생했다. 이슬람 급진 세력들의 테러가 파키스탄의 발목을 잡고 있다. 과거 탈레반이 벌이던 테러에 이제는 이슬람국가(IS)까지 가세한 상황이다. 지난 2월 그야말로 ‘피의 한 달’이라고 불릴 만큼 파키스탄 주요 도시가 테러에 시달렸다. 2월16일 남부 신드 주 세완에 있는 이슬람 수니파 성지를 겨냥한 IS의 자폭 테러로 90명이 숨졌다. 2월23일에는 동부 펀자브 주 주도 라호르에서 고급 식당과 유명 옷가게 등이 밀집한 ‘디펜스 하우징 지역’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최소 9명이 숨지고 30여 명이 다쳤다. 펀자브 주의 경찰 대변인 나야브 하이더는 “최근 라호르에서 잇달아 테러가 발생해 비상이 걸렸다. 이제 막 라호르 경제가 안정되어 가는데 큰 제동이 걸렸다”라고 말했다. 라호르에 있는 극단주의 무슬림 전문가 모하메드 초드리 씨는 “시리아와 이라크 전선에서 밀려난 IS 무장대원 일부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으로 돌아오면서 최근 파키스탄에 폭탄 테러가 더 심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2월 내내 이어진 각종 무장 집단의 테러 공격으로 민간인 114명과 군인 22명 등 136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나와즈 샤리프 총리는 이렇다 할 테러 대비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언론인 나시르 파칼 씨는 “이제 겨우 피어나는 파키스탄 민주주의의 꽃이 테러의 피에 시들지 않기를 국민들은 바란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파키스탄·김영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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