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공을 많이 들였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지난 3월18일 중국을 찾았다. 틸러슨 장관의 방중은 이번 회담의 예고편이었다. 북핵 문제에 관한 미국의 요구와 미·중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주제를 조율하는 게 목적이었다. 조지프 윤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지난 3월23일자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 “틸러슨 장관은 왕이 외교부장 등에게 중국이 유엔안보리 제재(2270호와 2321호) 이행을 완전하게 해야 한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강조했다”라고 말했다. 당시 왕이 외교부장은 ‘쌍궤병행(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협정 동시 추진)’을 내용으로 하는 협상론을 개진했다. 조지프 윤 대표는 3월20일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한반도사무특별대표에게 “지금은 협상할 시기가 아니라 좀 더 강한 압박이 필요한 때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라고 한다.
‘김일성·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협상을 거부한다. 핵무기가 정권 붕괴를 막아줄 유일한 보험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의 계산을 바꾸려면 미국은 한국과 일본·중국과 손잡고 광범위하고 지속적이며 가차 없는 압박에 국제사회가 동참하게 해야 한다. 고집을 부릴수록 생존이 어려워진다는 걸 김정은이 깨달아야 한다. 북한에 가장 영향력이 큰 존재는 북한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이다. 중국이 북한 수출액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석탄 수입을 금지한 것처럼 실질적 대북 제재를 밀어붙인다면 김정은은 핵 개발을 추진할 돈이 부족해진다. 그러나 베이징은 대북 제재를 사실상 거부해왔다. 북한의 붕괴가 두려워서다.’
즉, 오바마 정부가 실패한 지점에서 트럼프 정부가 마지막 시도를 해볼 필요가 있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틸러슨의 “유엔안보리 대북 제재의 완전한 이행”이나, 조지프 윤의 “지금은 협상의 시기가 아니라 압박을 할 때”라는 말이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광범위하고 지속적이며 가차 없는 압박” 혹은 “유엔안보리 대북 제재의 완전한 이행”의 끝은 어디일까? 그것은 바로 ‘김정은이 자신의 계산을 바꿀 수밖에 없는 지점’, 즉 중국이 두려워하는 ‘북한의 붕괴 직전 단계’가 될 것이다. 미국 의회 일각에서 최근 주장하는 석유 공급 중단도 그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더 강력한 것은 북한 경제의 생명선인 북·중 간 비공식 국경 무역의 통제를 의미한다는 지적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4월2일자(현지 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들에는 앞으로 미국의 대북정책을 가늠할 만한 대목이 많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근’과 ‘채찍’을 모두 제시했다. “만약 중국이 우리를 돕는다면 중국에게도 좋겠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좋지 않은 상황이 될 것이다”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그런 다음 트럼프 대통령은 “만약 중국이 북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일대일로 북한 문제를 다룰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4월6일 플로리다로 향하는 전용기 안에서도 그는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중국에게도 좋을 것”이라는 얘기는 무슨 뜻일까? 한 외교 소식통은 “중국이 북한의 핵 동결을 끌어내면 특혜 관세를 보장하는 방안이 거론됐다”고 주장했다. 이 소식통은 “그동안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서 차별관세를 부과해왔는데 이를 폐지하고 일반 시장경제 국가에 상응하는 대우를 하겠다는 것으로 굉장한 특혜다”라고 덧붙였다. 사드 배치 문제도 협상 카드로 쓸 수 있다고 한다. 북핵 문제와 환율, 무역 불균형 등 중국이 하기에 따라서 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중단 내지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사드가 어떻게 될지는 미·중 정상회담 결과에 달렸다”라는 이야기가 워싱턴 정가에서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중국은 미국의 요구에 화답할까? AFP 통신에 따르면 시진핑 주석이 미국의 요구에 부응해 마련한 카드는 ‘중국과 북한의 은행 거래에 관해 어느 정도 양보하는 방안’이다. “중국 내에서 중국 기업 또는 은행으로 위장한 북한 기업·은행과 중국 은행 간의 금융거래를 차단하는 방안”에 대해 미국이 관심을 가져왔다는 얘기도 있다. 아직 구체적인 방안이 뭔지 알려지지 않아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점은 중국의 의지다. 보도 내용대로 북·중 간 은행 거래를 차단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면 별 의미가 없다.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과 중국 간에는 은행 거래가 거의 없다. 모두 현금으로 들고 다닌다”라고 지적했다. 북한의 대외교역에 종사해온 고위급 탈북자 역시 “중국이 시늉만 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바라는 ‘붕괴 수준의 대북 압박’에는 턱없이 부족한 셈이다. 지난 4월6일 시진핑 주석과의 첫 만남 후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우리는 이미 긴 대화를 나눴다. 지금까지는 얻은 게 아무것도 없다. 전혀 없다”라고 뼈 있는 농담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말한 “누구에게도 좋지 않은 상황”에 대해 일각에서는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기업이나 은행 등에 제재를 가하는 ‘세컨더리 보이콧’을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기업은 대체로 달러 경제와 단절되어 있어 제재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설령 세컨더리 보이콧으로 미국이 압박한다 해도 중국이 더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이렇게 중국이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면, 미국이 “일대일로 북한 문제를 다루는” 상황이 된다. 즉 북한 문제에서 중국이 배제된다. 중국을 끼고 대북정책을 펴온 오바마 정책과의 결별이다.
그다음은 당연히 트럼프 정부의 독자적 정책이 등장한다. 그 첫 페이지는 일단 “누구에게도 좋지 않은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다. 바로 군사 옵션이다. “모든 옵션이 테이블에 올라 있다”라는 말은 2002년 부시 정권에서 유행했다. 그런데 요즘 트럼프 정부 사람들의 단골 레퍼토리로 부활했다. 부시 행정부 시절에는 막연히 선제타격이나 예방공격을 거론하는 수준이었다면, 요즘은 ‘핵심부 타격(key point strike)’이라며 구체적 타격 대상에 대한 정밀폭격 시나리오까지 거론되고 있다. 첫 번째 타격 대상은 김정은 위원장을 비롯한 지휘부이며, 두 번째 타격 대상은 북한 핵시설이라는 것이다.
지난 3월 한·미 연합 독수리훈련이 시작되었다. 북한의 국지 도발에 대응한 핵·미사일 시설에 대한 선제타격과 북한 지휘부에 대한 참수작전을 핵심으로 하는 작계-5015(OPLAN-5015)에 따른 훈련이다. 말이 ‘핵심부 타격’이지 실제로는 전면전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5월 말 미국의 안보 전문 정보회사 ‘스트랫포’는 ‘(북한) 핵 위협 제거(Removing The Nuclear Threat)’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북한 정밀타격 작전 시나리오를 발표했다. 벙커버스터 폭탄을 탑재한 B2 스텔스 폭격기 10대 이상과 F22 전투기 24대, 그리고 토마호크 미사일로 무장한 오하이오급 잠수함 2~4대를 동원한 전면전 시나리오였다. 핵시설이 북한 전역에 은폐된 상황에서 정밀타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전략을 분석한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의 〈전략 공간의 국제정치〉라는 책을 보면, 북한의 핵전략은 현재 신흥국 핵전략 중 두 번째 단계에 와 있다. 첫 번째는 촉발 전략, 즉 핵을 상대국의 정치외교적 지원을 얻기 위한 협상 수단으로 사용하는 단계에서 적대국의 공격을 억제하기 위해 핵보복 위협을 활용하는 확증보복전략 단계로 진행된 것이다. 북한은 2013년 발표한 ‘핵보유국 지위 공고화법’이나 각종 성명을 통해 한국과 미국의 선제공격과 참수작전에 대해 핵으로 보복한다는 주장을 천명해왔다. 한·미 연합 독수리훈련 기간인 지난 3월6일 북한은 개량형 스커드 미사일 4기를 발사했다. 주일 미군기지 가운데 한·미 연합 독수리훈련에 참가하는 F35B 스텔스 전투기의 발진 기지인 이와쿠니 미국 해병 기지를 가상 타격 목표로 삼은 핵공격 모의훈련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그런데도 군사 옵션 얘기가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워싱턴의 보수 강경 분위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대화나 타협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한다. 또 북한이 시시때때로 도발하는 것 역시 그런 분위기 형성에 일조한다. 미국이나 북한 모두 대화를 하기 위해서 먼저 긴장을 고조시키기도 한다. 1960년대 초 쿠바 미사일 위기가 대표적이다. 물론 우발적 충돌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위험 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다.
트럼프, 푸틴 손잡고 국제관계 재편할까
그런데 대화 국면에서 미국의 파트너는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대북 ‘압박’의 파트너이지 ‘해결’의 파트너가 아니다. 오바마 시대의 파트너였을 뿐이다. 트럼프 시대를 열어갈 새로운 상대는 바로 러시아인 것이다. 트럼프가 얘기하는 독자 해법도 사실상 러시아와의 협의를 전제로 한다. 처음부터 러시아를 활용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돌아가는 것일까? 현재 워싱턴은 대선 기간에 있었던 ‘러시아 게이트’ 문제로 시끄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로서는 자신의 국제정치 구상을 위해 푸틴과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멘토’로 알려진 헨리 키신저는 일본 시사월간지 〈중앙공론〉(3월호)과 인터뷰하면서 “푸틴은 러시아가 유럽·아시아·중동에 걸쳐 국경을 접한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돈벌이에만 관심을 갖고 미국에 비협조적인 중국보다는 러시아가 훨씬 더 나은 파트너라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내년 재선에 성공하면 두 사람이 국제관계를 재편하는 골든타임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려면 먼저 푸틴 대통령에 대한 위싱턴의 부정적 이미지부터 바꿔야 한다. 북핵 문제야말로 절호의 기회다. 북핵 해결에 푸틴이 발 벗고 나서 기여함으로써 워싱턴의 부정적 기류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내년 대통령 선거 재선을 앞둔 푸틴에게도 뭔가 ‘작품’이 필요하다. 한반도가 미·러 신시대 개막을 위한 무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안톤 클로코프 러시아 안보위원회 학술자문위원이 지난 3월15일 평양에서 최선희 외무성 미주국장을 면담한 데 이어, 미·중 정상회담 하루 전인 4월5일 조지프 윤 대표가 모스크바에서 이고리 모르굴로프 러시아 외무차관과 장기간 중단됐던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를 시작한 점은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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