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먹여 살리는 건 여자”
  • 장일호 기자
  • 호수 499
  • 승인 2017.04.1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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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이탈 주민의 70~80%는 여성이다. 전선에 나가지 않은 북한 여성은 공동체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북한녀자〉는 각종 사료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실제 북한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춰 이를 분석한다.
박영자 연구위원(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이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2000년대 초반은 북한 주민의 탈북 러시가 이어지던 때였다. 그 이전에는 식량을 구하기 위한 ‘단순’ 탈북이 대부분이었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더 나은 사회와 삶에 대한 욕구가 주된 탈북 이유였다. 박 연구위원은 그중에서도 북한 이탈 주민의 70~80%가 여성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독일 통일 전 동독 사회와 비교해도 특수했다. 동독 여성의 체제 수호 의지는 남성보다 훨씬 강했다. 사회민주주의 제도가 지닌 ‘평등성’ 덕분이다. 중국이나 소련 등 20세기 현실 사회주의 국가를 살펴봐도 여성의 정치·사회적 지위 상승이 비약적이지는 않을망정, 일정 정도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린다.

북한은 이런 역사적 흐름에서 예외적이었다. 〈북한녀자〉(앨피 펴냄)는 박 연구위원의 2004년 박사 논문을 대중서로 고쳐 쓴 책으로, 그녀가 지난 15년간 꾸준히 연구해온 ‘북한 젠더사’다. 여성사의 많은 부분이 ‘정권이 어떻게 여성을 다루었나’에 집중하는 데 비해 〈북한녀자〉는 각종 사료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실제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북한 여성의 삶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해석했다. “전선에 나가지 않은 여자들은 놀고먹었나? 아니다. 훨씬 더 힘들게 공동체 생존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 각종 물자를 생산하고 지원하고, 사회 다수 구성원이며 약자인 노인과 어린이의 삶을 지켰다.” 이 같은 여성 동원의 바탕에는 해방 후 전개된 북한의 남녀평등 정책이 있었다고 박 연구위원은 분석한다.

ⓒ평양 조선중앙통신3월8일 북한 동평양대극장에서 세계여성의 날(국제부녀절) 107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만수대예술단 삼지연악단의 공연 모습.

해방 이후 소련의 후광을 업고 조선에 돌아온 김일성 주석과 해외 공산주의 세력이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은 농민과 여성이었다. 1945년 10월25일 김일성 주석은 “우리의 이 건국 사업은 녀성들을 이중삼중의 구속과 온갖 사회적 불평등으로부터 해방하는 위대한 혁명 사업입니다”라고 연설한다. 1946년 7월30일에는 남녀평등권 법령이 제정된다. 모든 영역에서 남녀가 평등할 것과 동등한 선거권, 동일 임금과 교육의 권리, 자유결혼과 자유이혼의 권리, 동등한 상속권 등을 규정한 이 법령은 당시 남한에 비해 가히 혁명적 조치였다.

그러나 이처럼 ‘위에서’ 주어진 여성해방은 남성 중심의 질서에 익숙해져 있는 당 구성원들로부터 강한 반발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하급 관리들은 여성 대중 조직화나 여성의 경제 참여를 부차적인 사업으로 인식했고, 지시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1970년 시행된 ‘3대 기술혁명’ 중 하나로, “여성들의 부엌일을 덜어주기 위해” 지역마다 세워진 밥 공장과 반찬 공장의 실패는 이러한 분위기를 잘 반영하는 사례다. 경제위기가 증폭되면서 점차 이용 빈도가 낮아진 것이 유명무실해진 주원인이었지만, “남편들이 가정식을 좋아해서”라는 이유 역시 간과할 수 없었다.

북한은 국제사회로부터 인권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여성해방’을 내세우곤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남녀평등권 법령을 들이미는 식이다. 2001년에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가입하기도 했다(물론 실태 조사를 위한 방문은 한 차례도 허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북한 당국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역할이라고 인식된 가사와 양육은 그대로 여성 몫으로 남긴 채, 노동자 구실을 추가했다. 전통적인 가족공동체 관리와 가사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북한 여성들은 혁명적 노동자이자, 혁명의 어머니라는 이중 노동의 존재로 ‘주체화’되었다.

박 연구위원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한국전쟁 시기다. “한국전쟁은 남북한 사회와 젠더 구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남북한 모두에서 민주주의의 유예와 국민 통제, 대중 참여를 억압하는 근거가 되었다.” 1960년대 주체사상을 사회의 지도 원리로 완성한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절대권력이 강화되면서 ‘수령’에 대한 충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잣대가 되었다. 개인숭배에 기초한 여성 역할의 강조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북한의 특수성이다.

“북한을 먹여살리는 건 여자”

해방 이후 김일성 주석이 ‘야심차게’ 선보인 여성정책 역시 점차 후퇴한다. 1974년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남한에 뒤지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어머니로서의 구실이 정책적으로 강화되는 모습도 보인다.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어머니 김정숙을 대표 여성상으로 가르치는 식이다. 노동정책에서도 불평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난의 행군으로 상징되는 경제위기는 상시적이었고, 공장 가동률이 저하됨에 따라 가내 작업반이나 가내 부업 강화 등 비공식 노동 분야에 여성을 배치했다.

ⓒ윤성희박영자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 연구위원은 〈북한녀자〉를 통해 북한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북한 당국이 여성을 ‘비공식 노동’ 분야에 배치한 것은 결과적으로 ‘2차 경제’를 창출하는 효과를 낳았다. 현재 북한 체제를 유지시키는 것은 여성들이 중심이 된 2차 경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내 작업반은 북한 여성들이 시장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고, 이 과정에서 ‘돈맛’을 알게 된 여성 주체가 등장했다. 현재 합법화된 종합시장만 북한 내에 400개가 넘는다. “시장 나가서 돌멩이 뿌리면 맞는 게 다 여자”라는 말도 나온다. 경제 사범의 80%도 여성이다. 권력에 의한 가부장적 젠더 인식이 아래로부터의 변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역설적으로 북한의 ‘시장화’가 여성해방을 견인하는 모양새를 보인다.

“달리는 여맹, 앉아 있는 당, 서 있는 사로청”이라는 말은 현재 북한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여맹(조선민주여성동맹)은 31~55세 여성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대중 조직이고, 사로청(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은 청년·학생·직장인·군인 등 주로 남성을 대표하는 조직이다. “북한을 먹여 살리는 건 여자예요. 남자는 싹 간부만 하고 건들건들 일도 안 하면서 왔다 갔다 하고요. 그래도 책임자는 남자지요(탈북 여성 A).”

박 연구위원은 “한국 대중매체를 통해 보이는 ‘북한 여성은 순종적일 것’이라는 이미지는 거대한 환상”임을 지적한다. 북한 여성의 생계 부양 책임이 가중되면서 당국에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동거와 결혼 기피도 빈번히 벌어진다. 여성이 경제 주도권을 갖게 되면서 연상연하 커플도 유행한다. 이는 1990년대까지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북한 여성의 ‘극적’ 변화이기도 하다. 여성 탈북민 비율이 높은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북한은 오늘도 여성 주도의 거대한 자력갱생 시스템 위에서 불안한 행보를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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