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식되지 못한 얄타 체제의 망령
  • 남문희 기자
  • 호수 499
  • 승인 2017.04.1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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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회담은 징벌을 받아야 할 전범국인 독일에 대해 전승국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앞세워 면죄부를 준 나쁜 선례를 남겼다. 이는 전범국 일본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결과적으로 엉뚱하게 한반도가 분단되고 말았다.
리바디아 궁은 얄타 시내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숲속에 있다. 얄타에서도 최고 명당인 모가비 산등성이다. 흰색 화강암으로 만든 신르네상스풍 건물의 왼쪽으로 흑해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졌다.

1945년 버지니아 뉴포트에서 순양함 퀸시 호를 타고 지중해 몰타까지 7812㎞를 항해한 루스벨트는 몰타에서 처칠과 사전 회담을 했다. 다시 스몰렌스크의 사키까지 2200㎞를 비행기로 날아갔다. 거기서 다시 자동차로 5시간을 넘게 달려 겨우 얄타에 도착했다. 미국을 떠나기 전 4선 고지를 위한 대통령 선거와 취임식을 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다. 얄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반송장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1945년 2월4~11일 미국·영국·소련 3국 정상회담의 ‘호스트’ 격인 스탈린은 리바디아 궁전 별관에 루스벨트와 수행원들의 거처를 마련해주고 자신은 인근의 유스포프 궁전에, 처칠은 보론초프 궁전에 거처를 마련했다.

리바디아 궁은 1860년대부터 러시아 왕족이 여름 별장으로 이용해왔다. 1909년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인 니콜라이 2세가 그의 아내와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가 르네상스식 궁전의 화려한 모습에 감탄하고 돌아와 신르네상스풍으로 개조했다. 정작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비운의 생을 마칠 때까지 대여섯 번밖에 이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궁전 2층에는 황제 가족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는 흑백사진과 집기들이 보존되어 있다.

ⓒ시사IN 남문희
ⓒ시사IN 남문희1945년 얄타회담이 열린 리바디아 궁전(맨 위)에는 회담에 참여한 루스벨트·스탈린·처칠(왼쪽부터)의 밀랍인형이 놓여 있다.
회담은 주로 1층의 크고 작은 회의실에서 이뤄졌다. 현관문을 통과해 왼쪽으로 돌아가면 스탈린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루스벨트와 처칠의 밀랍인형이 있는 방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아지타 리나야 룸. 루스벨트의 응접실과 서재로 쓰였던 방으로 회담 나흘째인 1945년 2월8일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처칠을 배제하고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과 보상 문제,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문제 등 한국의 운명과 관련한 문제를 논의한 역사의 현장이다. 남북 분단의 기원이 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계속 돌아가면 얄타회담 합의문 서명식이 거행된 곳이 나온다. 리바디아 궁전의 전용 당구장인데 회담 기간 루스벨트와 수행원들의 식당으로 쓰였다고 한다. 회의실 곳곳에는 회담 당시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루스벨트는 사진에서도 병색이 완연했다. 뇌경색 후유증을 앓고 있던 그는 실제로 회담 후 두 달 만에 사망했다. 처칠은 회담 내내 대영제국의 쇠락한 위상을 실감해야 했다. 찡그린 듯한 표정에서 불편한 심경이 느껴졌다. 신생 사회주의 국가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 스탈린만 표정이 밝아 보였다.

얄타회담 이후 서방에서는 루스벨트가 스탈린에게 너무 많이 양보했다고 해 ‘얄타 콤플렉스’라는 말까지 생겼다. 그렇다고 스탈린이 모든 성과를 독차지한 것은 아니다. 소련은 회담 이전에 이미 동유럽과 중부유럽까지 점령한 상황이었다. 얄타회담이 없었다면 오히려 베를린까지 밀고 들어갈 판이었다. 정작 가장 중요한 독일의 전후 처리 문제에서 스탈린은 명분만 얻었을 뿐 실질적인 내용은 하나도 관철하지 못했다.

ⓒ시사IN 남문희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교수와 국내 전문가들이 얄타의 한 호텔에서 ‘한·러 대화’를 개최했다.
독일의 전후 처리와 관련해 얄타회담은 그보다 앞선 테헤란회담·퀘벡회담에서 포츠담 선언으로 넘어가는 분기점이었다. 얄타회담 전까지 미국이나 유럽, 소련의 분위기는 “이 지구상에 이런 독일이 두 번 다시 나와서는 절대 안 된다”라고 할 정도로 강경 일색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41년 12월 스탈린은 독일을 오스트리아, 동프로이센, 루르·자르 등의 라인란트 지역, 바이에른 주 등 4개 지역으로 분할하고 기계류로 현물 배상을 하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전후 처리 구상을 가다듬었다. 소련의 전쟁 협조가 필요했던 영국과 미국은 1943년 12월 테헤란회담까지만 해도 이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1944년 9월 퀘벡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이 사전 회담을 할 당시 미국 국무부와 군부는 좀 더 온건한 전후 처리 방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론을 등에 업은 헨리 모겐소 재무장관의 이른바 ‘모겐소 플랜’에 밀렸다. 모겐소 플랜은 ‘독일을 3개국으로 분할하고 중공업을 제거하며 화학·금속·전기·공장 등을 해체해 배상함으로써 독일을 아예 감자밭(Potato Patch)으로 만든다’는 강경한 안으로 스탈린의 전후 구상과 비슷했다.

전승국 대표들 밥 먹는 것도 감시한 독일

퀘벡회담을 계기로 루스벨트와 처칠도 모겐소 플랜에 합의했다. 하지만 둘은 얄타회담에서는 교묘한 지연작전을 벌였다. 독일 문제는 이틀째인 2월5일부터 다뤄졌다. 스탈린이 테헤란회담을 거론하며 독일의 분할·배상금·공업시설 해체 문제 등을 제기했다. 처칠이 주로 이견을 제시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을 편들어주는 척하면서도 각론에서는 처칠 편에 서는 외교술을 구사했다. 루스벨트 대신 트루먼이 등장한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에서는 악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미·소 관계가 영향을 끼쳤다. 전후 중부유럽에 대한 소련의 진출을 막는 세력 균형의 중심지로 독일 재건이 필요해진 것이다.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에 의한 한시적인 점령정책만 합의했다. 독일은 분단된 채 냉전 기간 고통을 겪었지만 전승국들의 도움으로 재건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즉 얄타회담은 징벌을 받아야 할 전범국이자 가해국인 독일에 대해 전승국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앞세워 면죄부를 준 나쁜 선례를 남겼다. 그 선례는 후에 똑같은 전범국이자 가해국인 일본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EPA1989년 9월25일 동독의 공업도시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월요시위는 베를린 장벽 붕괴의 원동력이 되었다.
반면 폴란드 등 동유럽과 한반도는 전범국한테 받은 피해에다 전승국의 가해까지 감당해야 하는 부조리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한반도 문제를 비롯한 극동 문제에 대한 협의는 2월8일 아지타 리나야 룸에서 루스벨트와 스탈린 사이에서 이뤄졌다. 당시 루스벨트는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과 미군 피해 축소를 위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절실했다. 참전을 이끌어낼 대가가 필요했다. 1955년 미국 국무부가 발간한 <얄타 비밀협정>에 당시의 대화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다. 루스벨트가 먼저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를 소련으로 귀속시키는 데 난관이 없을 것이다’라며 운을 뗀다. 그다음 ‘극동의 부동항과 관련해서 중국 다롄 항 사용권을 소련에 부여할 것을 시사한 바 있는데 이 문제는 아직 장제스(장개석)와 의논할 기회가 없었다’라고 밝힌다. 그러자 스탈린이 남만주 철도 역시 제정 러시아 소유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자신들에게 할양할 것을 요구한다. 루스벨트는 이 역시 ‘장제스와 협의가 안 됐다’며 뒤로 미룬다. 그러자 스탈린이 결정적인 발언을 한다. ‘제 조건이 용납되지 않으면 일본과 전쟁해야 할 이유를 소련 국민에게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독일과의 전쟁은 국민들이 이해하지만 자기들과 직접 관계가 없는 국가(일본)를 상대로 한 전쟁은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미국의 참전 요청과 그에 대한 대가 지불 약속이 없었다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소련의 한반도 진출도, 그리고 분단도 없었을 것이다. 독일처럼 분할되었어야 할 전범국 일본 대신 엉뚱하게 한반도가 분단된 것이야말로 전승국에 의한 첫 번째 가해였다(지난 2월9일 국제한민족재단이 얄타 현지에서 개최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교수들과의 라운드 테이블에서
ⓒ시사IN 남문희1855년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함대를 막기 위해 자침 전술을 펼친 세바스토폴 항구 입구에 크림전쟁 기념탑이 서 있다.
유리 아키모프 교수는 “당시 소련은 유럽 전선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어 한반도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음은 신탁통치 문제다. 루스벨트는 ‘한국을 미·소·중 3국 대표로 구성된 신탁통치위원회 관리하에 둘 의사가 있다. 신탁통치의 유일한 경험 지역인 필리핀은 자치 준비에 50년이 필요했는데 한국은 20년 내지 30년밖에 필요치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스탈린은 ‘그 기간이 짧을수록 좋다. 한국에 외국군을 주둔시킬 것인가’라고 질문한다. 그러자 루스벨트가 ‘부정적이다’라고 대답하고 스탈린도 이에 동의한다. 루스벨트가 ‘신탁통치에 영국 참여를 권유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데 처칠이 감정적으로 불쾌해한다’고 말하자 스탈린은 ‘만약 그러면 처칠이 우리를 죽이려 들 거다. 영국도 초빙해야 한다’라고 답한다. 그렇게 해서 미·영·소·중에 의한 신탁통치안의 윤곽이 잡힌 것이다.

여기까지가 얄타에서 거론된 한반도 관련 내용이다. 얄타회담 이후 독일과 우리는 대응이 달랐다. 그것이 바로 현재 운명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은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 이후 자신들의 운명에 관한 한 전승국이건 주변국이건 자신들 모르게 논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심지어 전승국 대표들끼리 밥 먹는 것조차 감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포츠담 선언 이후 1990년 5월 베이커 미국 국무장관의 제안에 따라 독일 통일을 위한 2(동·서독)+4(미·영·프·소) 회담이 개최될 때까지 전승국만의 공식 모임은 단 한 차례도 열린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누가 독일 운명의 키를 쥐고 있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해 결국 그 열쇠를 받아냈다. 그런 면에서 1970년 8월 서독 브란트 총리가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것이야말로 얄타 체제 극복을 위한 중간 기점이 되었다. 당시 소련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는 “독일이 통일될지는 모르겠으나 내일부터 통일을 향해 한발 내딛게 된 것은 틀림없다”라고 평가했다. 그 이후 20년 만인 1990년 9월 2+4 회담의 최종 타결로 얄타 체제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통일이 아니었다. 1989년 9월25일 동독의 공업도시 라이프치히에서 월요시위가 벌어졌다. 독일 통일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당시 동독 주민들은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를 외치며 매주 월요일 시위에 나섰다. 8000명으로 시작한 시위는 그해 11월 베를린에 100만명이 운집하며 마침내 분단의 장벽을 허물었다.

반면 우리는 해방 직후 친탁·반탁을 둘러싼 좌우의 대립과 한국전쟁을 거친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과정에서 독도 문제도 명확히 매듭짓지 못했다.

독도 문제는 전승국에 의한 2차 가해


패전국 일본의 전후 영토 처리 과정에서 독도는 한국으로 반환될 대상으로 명시됐다. 일본 로비를 받은 미국의 방기로 1951년 9월 최종 서명 과정에서 누락됐다. 오늘날 한·일 간 분란의 원인이 된 것이다. 분단이 전승국에 의한 1차 가해라면 독도 문제는 2차 가해이다. 혹자는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협정 체결, 그리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강요하는 미국의 행태를 3차 가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현대판 ‘가쓰라태프트 조약’이라는 것이다. 독일은 1990년대에 종식시킨 얄타 체제의 망령이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기승을 부린다.

우리에게는 과연 무엇이 부족했던 걸까. 2월11일 리바디아 궁전 방문에 앞서 오전에 세바스토폴에 들렀다. 세바스토폴은 크림반도 최대 요충지로 흑해함대 사령부가 있는 곳이다. 1853~1856년의 크림전쟁을 비롯해 히틀러의 크림반도 침공의 주요 무대이기도 하다. 세바스토폴의 중심지는 라히모프 광장이다. 라히모프는 크림전쟁 당시 해상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는 전설의 해군 장군이다. 1855년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함대가 세바스토폴 항구로 밀려 들어오자 힘의 열세를 느낀 라히모프 장군은 자신의 함대를 침몰시켜 적의 해상 진입로를 막는 자침 전술을 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전사한다. 함대를 침몰시켰던 그 자리에 세바스토폴의 랜드마크인 크림전쟁 기념탑이 서 있고 그 맨 위에 날개를 펼친 독수리상이 있다. 독수리상이 담고 있는 의미는 스위스 ‘빈자의 사자상’과 같다. 목숨을 던져 조국을 지키는 ‘장엄한 죽음’, 불굴의 정신이다. 크림인들이 이 기념탑을 랜드마크로 삼은 이유다.

돌아오는 길에 모스크바에서 극동문제연구소 전문가들과 토론하는 자리에서 뼈아픈 충고를 들었다.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의존해서 해결하려 하면 안 되며 자기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촛불시위를 통해 우리에게도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1989년 동독의 월요시위가 독일 통일의 활로를 연 것처럼 2016년 촛불시위로 시민들이 국가권력의 주인으로 등장하며 민주주의를 개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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