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은 웬만해서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 어느 병원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기 꺼려지는 병원은 산부인과였다. ‘출산’으로 대표되는 산부인과라는 장소에 대한 편견을 나 역시 무의식중에 갖고 있었다. 물론 생리대를 검은 봉지에 담아 감춰야 하는 것만큼이나 ‘구린’ 생각이었다. 나는 요즘 여성들을 만날 때마다 산부인과 정기검진을 권한다. 여러분, 자신의 몸을 보살피세요!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나에게 맞는 산부인과를 찾기까지는 물론 긴 여정이 필요했다. 내가 만난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는 정말 최악이었다. 남자 의사는 ‘굴욕 의자’ 위에 올라앉은 내 허벅지를 자꾸만 건드렸다. “애인이랑 할 때도 이렇게 뻣뻣해요?” 싸우자는 건가? 그래서 싸웠다. 지금도 분하다. 그다음 선택한 곳은 대형 여성병원이었다. 이곳은 각종 특진비를 내밀거나 무한정 늘어지는 대기 시간으로 내 시간을 앗아갔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프랜차이즈형 산부인과를 찾았다. 문진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갑자기 간호사가 낮은 목소리로 소곤댔다. “진료 기록 남기고 싶지 않으면 비보험 항목에 체크하시면 돼요.” “왜요?” “…네?” “그러니까 왜 돈을 더 주고 그런 일을 하냐고요.” “아, 미혼인 분들은 부담스러워하시니까….” 산부인과 진료 기록을 감추어야 할 무엇으로 여기는 곳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싶지 않았다. ‘이쁜이 수술’ 같은 글자 따위가 적힌 광고판들 또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병원은 병을 개발하고, 환자는 몸을 계발해야 하는 기이한 공간 속에 놓여 있는 기분이 유쾌할 리가.
애석하게도 긴 시간과 돈을 들인 끝에야 ‘내 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의사가 나를 판단하는 사람이 아닌, 돕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곳. 의사는 사소한 질문을 귀찮아하지 않았고, 내 몸에 대해 꼼꼼히 물었다. 병원에는 요란한 미용이나 성형 광고도 없었다. ‘기본’을 하지 않는 병원을 여럿 경험한 탓에 나는 쉽게 이 산부인과에 반해버렸고 내 맘대로 주치의로 삼아버렸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도 현실의 의사에게 묻지 못할 질문들이 남아 있고, 그럴 때 펼쳐드는 책이 한 권 있다. 〈마이 시크릿 닥터〉(릿지, 2014)는 여성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망라하고 있다.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질문은 바뀌거나 달라질 테고, 그때마다 이 책은 조금 불완전할지언정 꽤 괜찮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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