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요즘 부쩍 느끼는 공포가 있다. 나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연이어 일으키는 사건·사고와 추문 때문이다. 떠오르는 생각은 두 가지. 저들은 왜 저렇게 행동하는가? 어떻게 하면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인가?

공교롭게도 오늘날 한국을 포함한 발전된 국가들 몇몇에서 나타나는 동일한 현상이 있다. 여성혐오와 차별을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고 외치는 페미니즘의 전 세계적 창발과, 사회적 주류인 (백인)남성들의 반여성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흐름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민주주의가 맞이하고 있는 위협의 중요한 한 축을 ‘남자 문제’라고 명명해도 될 것 같다.

사실 ‘남자’가 발견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가령 남자다움은 그저 모두에게 권장할 만한 미덕을 모아놓은 것이지, 남자라는 성별의 특성을 일컫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반대에 있는 악덕은 언제나 여자다운 속성으로 여겨져왔다. 그뿐 아니라 특별히 성별을 명시하고 있지 않은 거의 모든 것들의 숨은 주인공은 남자였다. 페미니즘이 등장한 이후에야 보편성에 숨어 있던 남자를 하나의 특정한 성별이자 정체성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정켈 그림

모든 시대의 남자는 그 시대의 사회·경제·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다. 오늘날 남자 문제는 남자들이 맞이한 위기에 대한 퇴행적 대응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위기는 남자뿐만 아니라 사람들 대부분이 똑같이 겪고 있다. 삶의 조건이 팍팍해지고, 사회적 신뢰는 바닥났으며,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맹렬한 기세로 사그라들고 있는 2017년의 세계 말이다.

남자들에 의하면 세계는 페미니스트에게 장악되어 있다. 정·재계는 물론이고 언론과 사법기관에서 암약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는 음모를 꾸며서 ‘강간 반대’ ‘동일노동·동일임금’ ‘차별 금지’ 같은 무서운 일들을 관철하려고 하는 중이다. 이 때문에 남자들은 ‘역차별’을 당하며, 아무 말과 아무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다. 그래서 남자들은 온라인에서 페미니스트들에게 성추행을 하고 욕을 퍼붓거나, 존재하지 않는 사상을 날조하거나, 눈에 보이는 모든 여자들에게 ‘페미나치’ 같은 근본 없는 딱지를 붙이는 투쟁을 이어간다.

사랑받는 남자들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한다

이 삼류 음모론에 덧붙은 레지스탕스의 서사는 기존 소수자 운동의 요소들을 조야하게 모방한 것이다. 이 서사를 통해 남자들은 자신이 ‘정당한 피해자’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들이 이런 일련의 행위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 누구도 명시적으로 성폭력의 자유, 여성에 대한 사회경제적 차별 같은 것을 주장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근본부터 잘못된 논리 구조에 그럴싸해 보이는 단어를 아무리 들이부어도 명분은 쌓이지 않는다. 남은 것은 오로지 정당성의 앙상한 형식과 그것을 통한 정신승리의 길뿐이다.

우리 시대의 남성성은 분열적이다. 젠더 권력은 여전히 남자를 유리한 위치에 두지만 과거만큼 압도적이지는 않다. 여자들은 점점 대등한 경쟁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젠더 권력을 휘두르는 것 말고 자신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사수할 방법이 없는 남자들은, 온갖 비열하고 폭력적인 추태를 벌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남자들은 자신이 젠더 권력을 통해 짓밟은 여자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 게다가 남자들 간의 연대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남자들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한다. 그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는 다른 남자들은 그래서 모든 것을 비난한다. 이 뒤틀린 게임을 지속할수록 깊어지는 것은 상황을 타개할 필수 요소인 상호 신뢰의 상실이다.

결국 남자 문제의 핵심은 좋은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같은 남자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남성 가장’은 조만간 사용되지 않는 말이 될 것이다. 불합리를 참지 않기로 한 여성들을 과거로 돌려보낼 방법도 없다. 하루빨리 남자가 아니라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기껏해야 세계 멸망의 도우미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기자명 최태섭 (문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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