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국민에게 엄청난 직장 제공과 세금 납입으로 우리 경제를 도약시킨 세계 최고의 기업 총수를 사소한 재단 지원을 이유로 들어 구속하는 특검의 수준이 이렇게 형편이 없는 것인가?”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된 직후부터 스마트폰 메신저를 타고 장년층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한 작자 미상 메시지의 일부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삼성은 세계 일류 기업이고 우리의 주린 배를 불려줬으니 범죄 혐의가 있더라도 불구속 수사의 특혜를 줘야 하는데, 제 손으로 뭘 생산해보기는커녕 책상물림으로 법전이나 살펴보던 특검이 감히 구속 수사를 했다. 국민의 손으로 검사의 기소 독점을 깨야 한다.’

문득 1999년 보광그룹 탈세 사건 관련 조사를 받으러 대검찰청으로 출석하던 홍석현 회장을 위해 도열해 “사장, 힘내세요!”를 외치던 〈중앙일보〉 기자들이 떠올랐다. 2005년 삼성 X파일 수사 때에도, 2008년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매각 사건 수사 때에도 여지없이 자사의 회장을 위해 몸을 던지던 그들. 그나마 〈중앙일보〉 기자들은 제 고용주를 지킨다는 핑계라도 있었지, 일평생 삼성에 고용되어본 적도 없는 저들은 왜 메시지를 옮기며 “부회장님, 힘내세요!”라 외치고 있을까?

영화 〈베테랑〉의 조태오(유아인) 신진물산 기획조정실장은 범죄를 덮기 위해 갖은 편법을 동원한다.
2010년대 대중문화 속 사이코패스 재벌 3세들이 안심하고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배경에는 이런 자발적인 복종의 정서가 깔려 있다(〈시사IN〉 제494호 ‘사이코패스 재벌이 왠지 친숙한 이유’ 기사 참조). 알아서 복종하고 염려하고 용서하는 이들의 존재가 재벌에게 어떠한 확신을 심어준 것이다. 그것은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것이라는 확신, 내야 할 세금을 안 낸 것은 ‘고용창출’의 공으로 용서받고, 하청업체를 부당하게 쥐어짠 것은 ‘국가경제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용서받고, 이도 저도 아니면 ‘치열한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려면 선장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핑계로 용서받을 거라는 뒤틀린 확신이었다.

대중문화 속 재벌 3세들의 악행은 단순히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개인적 층위의 강력범죄에 그치지 않는다. 극중 재벌 기업들이 기업을 운영하고 수익을 창출하고 부를 축적하는 과정은 하나같이 아래를 향한 착취와 편법에 기반을 둔 것으로 묘사된다. 3세들의 폭력과 살인 같은 사이코패스 강력범죄 옆에 이러한 기업 범죄들이 나란히 배치된 것은 흥미로운 관점을 암시한다. 이 둘은 사실 별개가 아니라 같은 맥락 위에 있다는 관점 말이다.

영화 〈베테랑〉(2015)을 보자. 화물노조에 단체 가입했다는 이유로 임금이 밀린 채 국동화물에서 해고당한 화물트럭 기사 배철웅(정웅인)은 원청기업 신진물산 앞에서 일인 시위를 벌인다. 고용주인 국동화물 전 소장(정만식)에게 항의해봤으나, 그가 해고는 ‘본사’가 결정한 것인데 왜 자기에게 따지느냐고 말했기 때문이다. 조태오(유아인) 신진물산 기획조정실장의 호출을 받고 달려온 전 소장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말한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조태오의 대꾸는 차갑다. “큰일 날 소리 하시네. 내가 왜 대표예요, 이 양반아.”

신진물산의 사업 방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청업체를 실질적인 지배하에 두고 군림하면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가입을 억압하고 해고하는 궂은일은 전부 하청업체에 맡김으로써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하청업체는 원청기업이 지시한 사안이라는 핑계로 책임에서 달아나고, 원청기업은 자사 직원이 아니라 하청업체의 직원이라는 핑계로 책임에서 벗어난다. 조태오의 사이코패스 같은 범죄가 있기 전에, 신진물산의 사이코패스 같은 경영이 먼저 존재했다.

ⓒSBS 화면 갈무리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 속 남규만(남궁민) 일호그룹 상무는 모든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긴다.
사이코패스 범죄 전에 사이코패스 경영이 있다

조태오의 범죄가 터진 이후 그것을 덮기 위해 신진그룹이 동원하는 수단 또한 편법으로 가득 차 있다. 사건을 보도하려는 언론에겐 광고로 협박해 입을 틀어막고, 경찰 수사는 회사의 고문으로 스카우트해온 전직 경찰 고위 간부가 ‘친정’에 압력을 행사해 저지하며, 경찰 가족을 찾아가 뇌물을 건네며 사태를 무마하려 든다. 그래도 수사를 멈추지 않는 서도철(황정민)을 잠재우기 위해 불법체류 중인 외국인 조직폭력배들을 고용한다. 이 모든 시도에도 끝내 수사를 저지하지 못하자 그룹 내에서 천대받던 방계 라인인 최 상무(유해진)에게 죄를 뒤집어써줄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과정에 관여한 그 누구도 양심의 가책이나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데, 입을 열어 범죄를 증언한 인물은 스파링 중 조태오의 분풀이 상대가 되어 발목이 부러진 채 해고당한 비정규직 수행원(엄태구)뿐이다. 언론사나 전직 경찰 간부처럼 돈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신진그룹의 폭력을 대리 수행할 때, 버려짐으로써 돈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진 이만이 입을 열 수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베테랑〉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SBS 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2015~2016) 속 일호그룹도 그 성장 과정이 남규만(남궁민) 상무의 성정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극중 일호그룹은 대기업으로 크기 위해 경쟁사의 공장을 폭발 사고로 위장해 아예 날려버린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후에도 일호그룹은 자사의 과실로 생긴 사고를 하청업체 탓으로 돌린다. 하청업체 영원전기는 일호그룹의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단가를 후려쳐 전선을 생산하다가 불량제품을 대량 만들게 되고, 이로 인해 일호전자의 전자레인지가 폭발 사고를 일으킨다. 그러나 일호그룹은 전자레인지에 사용된 전구가 불량인 탓에 생긴 사고라며 하청업체인 미소전구에 책임을 전가한다.

대사를 통해 드러나는 사실은 더 참담하다. 3년 전 일호전자의 냉장고가 전선 불량으로 고장을 일으켰을 때에도 일호전자는 배상 책임을 냉각기를 만드는 하청업체에 뒤집어씌웠고, 하청업체는 문을 닫았다. 남규만이 환락 파티를 벌이다가 사람을 죽이고 그 죄를 애꿎은 이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처럼, 일호그룹은 비자금 조성을 위해 제품 생산에 들어가야 할 돈을 다른 호주머니에 넣다가 사고를 일으키고는 그 책임을 애꿎은 하청기업에 전가한다. 괜찮은 기업에 어쩌다가 미치광이 3세가 등장한 게 아니라, 애초에 양심 없는 경영으로 성장한 회사이기에 양심 없는 3세가 등장했다.

우리는 돈이 많아서 처벌을 피해갈 수 있고, 그렇기에 세간의 도덕률을 따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재벌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베테랑〉과 〈리멤버-아들의 전쟁〉에 묘사된 신진그룹과 일호그룹은 애초에 그 많은 돈을 축적하는 방법 자체가 세간의 도덕률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었다. 하청업체와 상식적이고 건강한 거래의 파트너로서 관계 맺는 게 아니라, 돈의 힘으로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때로 해고 같은 부당한 일을 대리시키며 문제가 터지면 책임을 전가하는 식의 착취 대상으로 바라보는 원청. 그러니 조태오와 남규만은 단순히 재벌 내 예외적인 3세가 아니라 재벌의 속성을 인격화한 악역인 셈이다. 우리가 조태오와 남규만을 사이코패스라 부를 때, 우리는 사실 재벌을 사이코패스라 지칭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자명 이승한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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