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1일은 동일본 지진 재해와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사고가 난 지 6년째 되는 날이다. 일본 경찰청과 부흥청 발표에 따르면 아직도 12만3168명이 전국 각처에 피난 중이다. 이와테·미야기·후쿠시마 3현의 임시주택 거주자만도 여전히 3만3854명이다. 3·11 재해 이후 병사와 돌연사, 자살 등 관련 사망자는 지난해 전국적으로 116명이 증가해 모두 3523명이다. 7만9226명이 피난 중인 후쿠시마 현은 재해 관련 사망자(2086명)가 3·11 당시 사망자 수(1613명)를 넘어섰다. 핵발전소 사고 수습이 거의 진척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3년 9월 올림픽 유치 연설에서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사고가 ‘통제 중(under control)’이라고 거짓 선언을 하더니, 올해는 사고 자체를 지우고 있다. 아베 총리는 추도사에서 ‘원전 사고’라는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재해 복구의 성과만을 치켜세웠다.

아베 총리와 도쿄전력이 지우려 하는 재앙의 흔적을 기억하고자 애쓰는 피난민이 있다. 2015년 3월부터 핵발전소 광고 간판을 영구적으로 현장 보존해달라고 서명운동을 펼쳤던 오누마 유지 씨다(〈시사IN〉 제395호 ‘27년 전 표어 지키자, 일본 전역은 서명 중’ 기사 참조).

ⓒ오누마 유지 제공 2012년 7월, 자신이 초등학생 때 낸 표어가 담긴 간판 앞에서 항의하는 오누마 유지 씨.
2015년 12월21일 오전 10시50분 후쿠시마 현 후타바 읍 중심가 입구에 설치된 ‘원자력, 밝은 미래의 에너지’라고 쓰인 간판의 철거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앞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흰색 방호복을 두른 오누마 씨와 그의 아내 세리나 씨가 나타났다. 두 사람 손에는 ‘철거가 복구?’ ‘과거는 지울 수 없다’라는 메시지 보드가 들려 있었다.

오누마 씨는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5·6호기에서 4㎞ 떨어진 후타바 읍에서 나고 자랐다. 1988년 오누마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숙제로 낸 표어 ‘원자력, 밝은 미래의 에너지’가 우수상을 받아, ‘원전 교부금’으로 마을 중심가 입구에 핵발전소 광고 간판이 세워졌다. 간판 아래를 지나다닐 때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소년 오누마는 원자력은 밝은 미래의 에너지라 배웠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청년 오누마는 2008년 지역에서 처음으로 도쿄전력이 밀고 있던 ‘ALL 전기화’ 주택의 임대 사업을 시작했다. 도쿄전력 관련 사업이라 은행 대출을 받기 쉬웠다. 고객 중에는 도쿄전력 직원이 많았다. 2011년 3월 말에는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었다.

2011년 3월11일 거대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핵발전소 폭발 사고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날아가버렸다. 핵폭발 사고에 관한 적확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 와중에 도쿄전력 직원들이 도망간다는 소식을 듣고, 무엇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 채 오누마 씨도 임신 7개월의 아내를 데리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삼각김밥으로 배를 채우고 이틀 동안 차 안에서 잠을 자며 100㎞ 거리의 처가로 갔다. 그는 1986년 체르노빌 사고도 있었는데 왜 피폭에 대해 공부해두지 않았나 후회했다. 2주 후 500㎞ 떨어진 아이치 현의 임시 거처에 도착해서는 ‘내가 바로 난민이구나’라며 탄식했다.

2015년 3월 그는 낡은 광고탑이 위험해서 철거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텅 빈 마을의 누구에게 위험하다는 건지, 무너져가는 폐허나 여전히 손도 못 대고 있는 후쿠시마 핵발전소보다 광고탑이 왜 더 위험하다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그는 표어 원안자로서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리고 2011년 태어난 아들에게 인간의 어리석음과 핵발전소 사고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서라도 현장 보존을 하고 싶었다. 그는 자기와 함께 표어로 상을 받은 입상자와, 자신에게 상장을 줬던 당시 후타바 읍장을 찾아가 서명을 부탁했다. 오누마 씨가 3개월 만에 6500여 명의 서명을 제출하자 그해 연말 후타바 읍사무소 측은 철거 후 보존으로 방침을 바꿨다.

ⓒ오누마 유지 제공 2015년 12월 오누마 씨는 고향 땅을 찾아 방사능 쓰레기 더미 등을 사진에 담았다.
‘원자력, 파멸의 미래 에너지’로 표어 수정

자신의 어리석었던 과거만 남길 수 없었다. 오누마 씨는 2017년 3월 초까지 80여 차례 고향 땅을 찾아가 멈춘 듯한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생명과 내버려진 죽음을 기록했다. 마을에 내려와 먹이를 찾아다니는 타조·너구리·멧돼지·소·돼지와 주인을 기다리는 개·고양이, 그리고 닭장에 갇혀 그대로 죽어간 닭, 버려진 돼지와 멧돼지 사이에 태어난 새끼들, 늘어가는 개·고양이의 사체를 사진에 담았다. 봄이면 여전히 눈부시게 하얀 벚꽃 사이로 늘어가는 방사능 오염 쓰레기들을 찍고 체류가 허용된 짧은 시간에 빼놓지 않고 자신의 표어를 수정했다.

피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그는 ‘재난과 거짓의 상징’으로 야유를 당할 때마다 깊은 절망과 죄의식에 시달렸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잃고 피난 중인 자신이 왜 그런 비난을 받아야 하나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의 핵발전 추진 정책에 동원되었던 자신이 부끄럽고 가해자 의식이 없는 도쿄전력에 화가 치밀었다. 2012년 7월 고향에 잠시 들어간 그는 아내와 함께 자신의 표어를 고쳤다. 흰색 방호복을 입고 앞에 선 그는 표어의 ‘원자력’을 향해 레드카드를 꺼내 ‘퇴장’이라고 외치고, ‘밝은’이라는 글귀 위로 ‘파멸’이라고 쓰인 종이를 높이 펼쳐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잘못된 표어가 ‘원자력, 파멸의 미래 에너지’로 다시 태어났다. 이후 그는 탈원전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달려가 자신과 표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가족과 함께 전국의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을 돌아다녔다.

“핵발전소는 마약과 같다”라고 오누마 씨는 말한다. 입지 지역의 지자체는 경제의 대부분을 핵발전소 교부금에 의존하다가 얼마 못 가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처음 몇 해는 교부금으로 마을에 돈이 돌고 회관이나 체육관을 지었지만 실제 주민들의 생활이 윤택해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돈줄이 마르고 마을의 인구 규모나 경관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시설의 방대한 유지비에 버둥거리는 어려움에 처하면 다시 교부금을 얻기 위해 발전소 증설을 원하게 된다. 결국 핵발전소에 의존하는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해 9월 경주에서 잇따라 발생한 지진 뉴스를 접한 오누마 씨는 깜짝 놀랐다. 2012년 ‘환경재단’에서 진행한 ‘피스앤드그린 보트’에 탄 그는 고리 핵발전소를 방문하고 주민들을 만난 적이 있다. 일본보다 지진·쓰나미 대책이 엄격하지 않은 한국의 핵발전소가 불안했지만 지진이 없다는 말에 안심했는데 경주에서 지진이라니 놀란 것이다. 그는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까지 핵발전소 사고는 계속 일어났고 인간에게 핵발전소 사고를 통제하거나 제어할 능력은 없다”라고 단언한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원자력의 안전 신화를 믿고 핵발전소와 기생해온 후타바 읍의 결말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이바라키 현을 제2의 고향으로 삼은 오누마 씨는 2014년 5월부터 재생 에너지로 생산하는 전기 공급자로 새 출발을 했다. 그의 태양광발전소에는 ‘재생 가능 밝은 미래 에너지’라는 표어가 걸려 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원전을 그만두느냐”라고 말하는 그는 탈원전이야말로 밝은 미래라 믿으며 표어와 함께 삶도 바꿔가고 있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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