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잘 그렸다고 보기 어렵다. 이야기도 특별하지 않다. 그런데 보는 내내 독자의 마음을 뒤흔들고 다음 회가 기다려져서 못 견디게 만드는 만화가 있다. 이런 만화는 대부분 연출이 잘되어 있다. 만화가의 실력은 이야기나 그림이 아니라 연출에서 드러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야기는 다른 매체에서 빌려올 수 있고, 그림은 스태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연출은 만화가의 몫이다.

만화 연출 기법은 사진·영화 등 시각매체와 함께 발전했다. 특히 일본의 만화가는 영상 연출 기법(쇼트·카메라 이동 등)을 적극 받아들여 독자의 몰입을 돕는 다양한 기법을 개발했다. 만화 고유의 연출 기법도 개발되었는데, 칸의 크기를 조절해 독자가 만화를 읽는 시선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방식이다. 말풍선, 등장인물의 동선과 시선을 일정한 흐름으로 배치해 읽는 흐름이 끊기지 않고 만화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이 두 가지 기법이 잘 결합되면 작가는 자신의 의도대로 독자가 만화를 읽는 속도와 흐름을 조절할 수 있다.

종이책으로 나오는 페이지 만화의 연출에 익숙한 만화가에게 스크롤 형식의 웹툰은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었다. 웹툰은 한 화면에 담을 수 있는 칸의 크기와 개수가 페이지 만화에 비해 작고 시선의 흐름과 움직임도 적다. 웹툰 작가들은 칸이 그려져 있지 않은 개방 컷을 적극 활용하고, 말풍선을 칸 바깥으로 빼내어 시선의 흐름을 유도한다. 또 컷과 컷 사이의 간격을 조절하여 읽는 속도를 조절하는 방식을 개발했다. 요즘 연재되는 스크롤 형식의 웹툰은 페이지 만화로 그려진 작품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읽는 재미를 준다.

〈투명한 동거〉 정서 지음, 네이버 웹툰
그와 그녀의 시선에서 그려내다

스크롤 형식 웹툰 중 가장 섬세하고 치밀한 연출을 보여주는 작품은 최근까지 연재된 〈투명한 동거〉다. 귀신과 동거하는 한 번역가의 이야기인데, 귀신을 보는 능력 때문에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귀신들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본다는 사실을 알면 그녀에게 하소연을 하려고 달려들었다. 그녀는 귀신들을 못 본 척하면서 자신의 문제로부터 도망치는 습관을 들였다. 번역을 하게 된 이유도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새로 구한 집에 젊은 남자 귀신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 집에서 도망쳤다. 그런데 남자 귀신은 다른 귀신들과는 조금 달랐다. 자신의 존재를 알아본 그녀를 반가워했지만 그녀가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스스로 떠나려 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능력과 관련해 남에게서 처음으로 배려받은 행동이었다. 그녀는 귀신과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 대화를 나누고, 공통의 사건을 겪으며 둘은 차츰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의지한다. 두 영혼은 연인이 되기에 이른다.

서로를 만질 수 없는 두 영혼이 배려를 키워가는 과정은 살아 있는 몸을 가진 연인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망설임 속에서 조금씩 나아가는 두 영혼의 감정을 작가는 수려한 연출을 통해 설명하지 않고 그려낸다. 두 영혼의 관계를 낮은 시점과 높은 시점을 오가며 조망하고, 그녀의 시선에서 또는 그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전달한다. 사람과 귀신의 연애라니 어떤 이는 허무맹랑하다고 느끼고 다른 이는 진부하다고 평할 만한 소재이지만, 〈투명한 동거〉는 작가의 연출력에 힘입어 허무맹랑하거나 진부하지 않은 사랑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기자명 박해성 (만화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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