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대학을 다닌 분 가운데는 나 같은 이가 많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유신 독재 아래 숨도 못 쉬던 시절 나는 진심 중국(그때는 중공이라고 불렀다)이 부러웠다. 중국 인민은 자기 힘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공화국을 세우지 않았던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천 년간 인민을 착취해온 악질적인 지주와 탐관오리들을 시원하게 응징했다. 그들은 원주민과 흑인을 말살하고 차별한 미국과 유럽의 백인과는 달리 소수민족을 오히려 우대한다고도 했다. 그때는 문화대혁명마저 불치병에 가까운 인간의 탐욕을 집단 교육을 통해 통제하려는 대실험쯤으로 이해하며 좋게 봤다.

홍군이 장제스 군대에 패해 대장정을 한 기록을 볼 때마다 나는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1934년 10월15일부터 후이안에서 옌안까지 1년여 동안 하루에 30㎞씩 1만여㎞를 그들은 도망쳤다. 떠날 때는 10만명이 넘었지만 도착했을 때는 겨우 8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죽음까지도 평등해서 마오쩌둥의 두 아이와 동생마저 생존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수많은 농촌 출신 소년·소녀병들이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나무에 기대선 채로 죽어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희생이 정의가 넘치는 새로운 공화국 건설의 토대가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이 꿈꾼 새나라가 어떤 모습일지는 그들의 행동에서 그려볼 수 있다. 적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피란을 떠난 농민들이 남기고 간 쌀 한 톨, 닭 한 마리 약탈하지 않았다. 불가피한 경우에는 최소한만, 그것도 반드시 차용증서를 남기고 나서야 손을 댔다. 그들은 농가 대문을 떼어내 침대 대신 쓴 다음 떠날 때는 완벽하게 되돌려놓았다. 정복자가 아니라 인민이란 바다를 헤엄치는 진정성 넘치는 물고기가 바로 그들이었다. 결국 바다는 큰 파도를 일으켜 서방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는 막강한 장제스 군대라는 초호화 유람선을 뒤집어엎고 말았다.

ⓒ한성원 그림

중국은 인민 제일주의 혁명정신을 전 세계로 전파하려는 것 같았다. 냉전의 진원지인 양극단, 미국이나 소련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외세 배격과 인권 옹호를 주장하는 비동맹회의의 맏형을 자처해 전 세계 진보 지식인의 갈채를 받았다. 중국은 이 행성 곳곳에서 신음하는 약자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냉혹한 제국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대국이 출현한 것만 같았다.

프랑스의 석학이자 문명비평가인 기 소르망에 따르면 예전에 젊은이들이 중국에 환상을 품게 된 것은 전 세계 진보 지식인들이 순진하게도 중국 공산당의 선전에 속아 넘어간 탓이다. 그들이 쓴 엉터리 책을 읽고 젊은이들은 중국 공산당을 정의의 화신처럼 떠받들게 됐다고 기 소르망은 개탄했다. 기 소르망은 진보 지식인들이 서구 사회에 들이댔던 것과 같은 엄정한 잣대를 중국에도 적용했다면 중국의 일그러진 모습이 진작 드러났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 혁명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기 소르망의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거부감이 있었지만, 10년여가 지난 지금은 그가 근거 없는 얘기를 한 게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사일 방어체계인 사드 배치에 찬성하지 않지만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을 보며 기가 막혔다. 정부 간에 문제가 발생했는데 선의를 가지고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민간인까지 위협하는 중국 당국의 행동에 화가 치밀었다. 거리와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한국인 협박이 당국의 의사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강변하지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짓이다. 중국은 구글이나 페이스북, 트위터도 모두 막아버린 나라 아니던가. 중국 당국의 검열을 거치지 않고는 어떤 폭력적인 언사도 온·오프라인 상에서 유통될 수 없다. 지금 중국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혐한 행위는 중국 당국의 명령 혹은 묵인·방조에 따른 결과이다. 나쁘게 본다면 이번 일을 트집 잡아 중국에 투자한 한국 기업이나 민간인의 재산을 약탈하려 한다는 의심을 사기에도 충분한 짓이다. 한국의 인민은 인민이 아니란 얘기일까. 중국 정부가 홍군의 전통을 이었다는 걸 차마 믿기 힘들다.

민족주의 감성이 발동해서가 아니라 지금 중국의 모습은 대장정 중에 죽어간 홍군이나 전 세계 젊은이들이 바랐던 미래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이제 우리는 이웃의 거인을 보다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국 인민은 자기 의사를 마음껏 표현할 자유를 뺏겼다. 공산당 지도부는 민의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가 아니라 감시자로 변했다. 인민은 1976년 마오쩌둥이 죽은 뒤 2012년 시진핑 국가주석이 권력을 잡기 전까지 체제에 도전하지 않는 한에서 표현의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시진핑은 수억명 중국인이 인터넷에서 낄낄대는 걸 불안해했다. 일제 단속을 위해 수천 개의 센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변호사나 활동가 수백명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혔다. 학교에서 자유로운 토론이 금지되었다. 뉴욕에 있는 국제 언론감시단체에 따르면 2015년 12월 현재 언론인 49명이 감옥에 있다. 큰 나라 가운데 중국의 언론 통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민은 입이 막혔지만 관의 시진핑 찬양은 점점 ‘발랄’해지고 있다. 정부가 만든 비디오에서 젊은 여성이 포크 스타일로 노래를 부른다. “누군가와 결혼하려면 시 아저씨 같은 사람과 하세요. 모든 일에 잽싸고, 결단력 있고, 양심적인 사람 말입니다.” 중국 관영매체들이 호 아저씨(호찌민)를 본떠 시진핑을 시 아저씨로 부르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최근 비디오 중 압권은 시진핑이 벌이는 부패와의 전쟁을 칭송하며 “파리가 됐든, 호랑이가 됐든, 괴물이든, 변종이든 모두 싸워 무찌른다”라고 노래한 것이었다. 지난해 시진핑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인민일보〉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신문은 베이징에 사는 젊은 외국인 여성들이 시진핑에 대해 ‘슈퍼 카리스마틱하다’ ‘무지 귀엽다’고 말하며 장래 남편이 시진핑을 닮았으면 한다고 전했다. 얼마 전 중국 인민대회에 티베트 대표들은 시진핑 배지를 가슴에 달고 나타났다. 중국의 시진핑 우상화는 러시아의 푸틴 찬양과 견줄 지경이 됐다.

이런 모든 현상은 마오 시절 목격했던 컬트화의 조짐이다. 컬트화가 진행되면 권력은 쓴소리를 듣기 싫어한다. 중국은 지난해 높은 의료비와 베이징 시의 엉망인 교통, 그리고 나랏돈을 떼먹는 관료를 비난한 IN3라는 힙합그룹의 노래 17곡을 금지했다. 닭의 목을 비트는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보는 자유롭게 흐르지 못하고 당연히 정부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힘들게 된다. 최근 몇 달 동안 중국의 주식시장이 요동쳤을 때 중국 정부는 전문가들에게 행복한 표정을 지으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경고를 발한 전문가들은 입을 다물거나 의견을 번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중국 관련 뉴스 가운데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늘어간다.

해마다 이맘때 러시아 최북단의 동시베리아해에서는 원주민인 야쿠트족 수백명이 해빙되기 직전의 얼음 육교를 건너 인근 섬들로 흩어진다. 그들은 그곳에서 다시 얼음이 얼어붙기 전까지 짧으면 6개월, 길면 8개월을 보낸다. 집에 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파도가 거칠기로 악명 높은 북극해를 목숨을 걸고 작은 보트로 건너야 한다.

시진핑 우상화는 러시아 푸틴 찬양과 견줄 정도

그들이 북극곰의 먹이가 될 각오를 하고, 해안경비대의 눈을 피해 그곳에 머무는 것은 ‘하얀 금’을 캐기 위해서다. 이곳에 고립돼 3700년 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매머드(맘모스)의 엄니 말이다. 통나무만 한 매머드 엄니는 큰 것이 70㎏에 달하며 6만 달러를 호가한다. 기후변화로 만년빙에 갇혔던 이 매머드의 사체가 속속 모습을 드러내면서 소련 해체 이후 침체를 거듭해온 이곳 경제가 때 아닌 호황을 맞았다. 상아가 국제무역 금지 품목이 되면서 매머드의 엄니는 대체재, 아니 그 이상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 엄니의 90%가 향하는 곳이 바로 중국이다. 이 엄니에 광둥성 장인이 불상 수백 개를 새겨넣으면 백만 달러짜리 애장품으로 변신한다. 중국 부자들은 수천 년 전부터 상아로 된 조각품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고도성장기에 원 없이 돈을 번 중국의 벼락부자들 사이에서 매머드 조각은 특별한 부의 상징으로 통한다. 이런 사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중국은 육상동물 가운데 가장 크고 똑똑한 코끼리의 밀렵을 부추기는 주범이기도 하다. 2012년 홍콩에서는 6t에 이르는 밀렵 상아가 적발되었다. 환경운동가들이 중국 정부에 코끼리 밀수입을 강력 단속하라고 요구했지만 별 효력이 없다.

중국 정부의 아킬레스건은 티베트이다. 1949년 중국 인민해방군은 그 이름이 무색하게도 티베트를 침공했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의 귀족·승려·시민을 부당하게 체포하고 고문했다. 탄압에 시달리던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수많은 티베트인이 고향을 등지고 망명길에 올랐다. 중국 국내 언론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언론인이라도 티베트를 취재하려 하면 중국 정부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막았다.

티베트에서는 축제가 벌어지는 동안에도 공안이 소방차를 대기하고 감시한다. 분신을 막기 위해서다. 2008년 대규모 소요가 일어난 이래 승려들을 포함해 123명이 중국 정부의 압제에 항거해 분신했다. 티베트의 중국 인민대회 대표가 시진핑 배지를 가슴에 달 수밖에 없었던 사실이 이 지역의 특수한 사정을 설명한다. 중국에 항거하는 원주민과 순응하는 원주민 사이에, 그리고 이 지역의 부를 점점 잠식해가는 한족 사이에 긴장이 높아간다. 중국의 티베트 점령은 혁명정신에도 비동맹 정신에도 어긋난다. 중국이 결코 소수민족에게 관대하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5월이 되면 티베트 고원지대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이 지역 학생들은 모두 4주간 방학을 받아 산으로 올라간다. 어른들도 가축이나 밭을 돌보는 일을 작파하고 산으로 간다. 아직 늑대가 어슬렁거리고, 번개라도 치면 피할 곳이 없는 벌거벗은 슬로프에서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네 발로 기어 다니면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제498호에 계속)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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