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팎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스위스는 지난해 기본소득 도입을 앞두고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핀란드는 올해부터 기본소득 시범사업을 시작했으며, 프랑스 사회당은 기본소득을 주창하는 브누아 아몽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국내에서는 조기 대선을 맞아 이재명, 심상정 등 여러 후보가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내놓았다. 분위기로만 보면 금세 기본소득 세상이 될 듯하다.

하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혼란스럽다. 상표는 모두 기본소득이지만 내용물의 차이가 크다. 대략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애초 원리에 충실한 ‘완전’ 기본소득. 근로 여부를 따지지 않고 모든 국민에게 적정한 금액을 지급한다. 대표적 사례는 스위스에서 제시된 ‘월 280만원 기본소득’. 금액은 스위스 상시노동자 평균소득의 3분의 1 수준으로, 한국에 적용하면 월 110만원이다. 이를 위해선 대략 연 600조원, 올해 중앙정부 총지출 400조원의 1.5배가 필요하다.

두 번째는 ‘낮은’ 기본소득. 이재명 성남시장이 모든 국민에게 월 2만5000원씩 지급하겠다는 토지배당, 작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제안한 ‘월 30만원 기본소득’이 여기에 해당한다. 기본소득의 원리를 담았다는 상징성을 지니지만 금액이 적어서 재정 대비 실효성이 미약하다. 월 2만5000원 기본소득을 위해 사용될 연 15조원을 취약계층·아동·노인 등 특정 집단에 집중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세 번째는 ‘사회수당형’ 기본소득. 이는 아동수당, 장애인수당, 기초연금 등 노동시장 밖에 있는 집단에 현금 복지를 제공하는, 복지국가의 사회수당과 같은 제도이다. 근래 청년의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등장한 청년수당, 농업의 특수성을 반영한 농민수당도 사회수당형에 가깝다.

네 번째는 실업부조형 기본소득. 핀란드 정부는 취약계층 실업자를 대상으로 기존 실업부조 월 70만원을 ‘기본소득’ 이름으로 제공하되 소득이 생기면 이를 별도로 인정해 근로 동기를 높이는 정책을 도입했다. 2년 기간으로 2000명에게 제공하는 시범사업인데, 사실상 실업부조 혁신안이나 다름없다. 박원순 시장이 ‘한국형 기본소득’이라며 내놓은 청년수당(구직할 때까지 월 25만원 지급), 실업급여(장기 실업자에게 월 30만원 지급)도 이 유형에 포괄될 수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의 대선주자인 이재명 성남시장이 2일 오전 서울 은평구 서울혁신센터를 방문, 장애인연대 정책협약서에 서명한뒤 악수하고 있다. 이날 이 시장은 '청년정책! 내:일이 있는 나라'라는 제목의 9대 청년 정책을 발표했다. 2017.3.2

 


이 네 유형을 모두 ‘기본소득’으로 볼 수 있을까? 기본소득의 핵심은 노동 여부와 무관하게 제공된다는 점이다. 소득이 있는 사람까지 포괄해 ‘무조건’ 지급해야 기본소득이다. 이에 따르면 실업자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실업부조 혁신안을 기본소득이라 부르는 건 무리이고, 사회수당형 역시 노동시장 밖의 사람이 대상이기에 기본소득 족보로 보기는 어렵다. 기본소득 설계도에 토대를 둔 건 완전 기본소득과 낮은 기본소득이다. 완전 기본소득은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시대에 조응하는 매력적인 제도이나 재정소요액이 너무 커서 지금 정책적 논의 대상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낮은 기본소득도 아직은 대다수 사람들이 일하는 상황(OECD 고용률 평균 67%)에서 예산 대비 효과성을 두고 논란이 크다.

기본소득을 상상하되 복지체계 촘촘히 보강해야

결국 현실에서 논의 가능한 유의미한 유형은 사회수당형이다. 우리나라에서 여러 대선 후보가 내놓은 기본소득 공약 역시 거의 아동·청년·노인 등을 위한 사회수당이다. 작년 총선에서 녹색당이 내놓은 ‘40만원 기본소득’도 1단계로 노인·장애인·농어민·청소년·청년을 대상으로 하고, 프랑스 사회당 후보도 완전 기본소득을 지향하지만 우선 내놓은 방안은 18~25세 청년이 대상이다.

사회수당형이 향후 완전 기본소득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기본소득 쪽은 ‘진화’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만 반대쪽은 노동시장 안의 사람까지 포괄하는 별개의 제도여서 DNA가 다르다고 비판한다. 관건은 노동시장의 상태이다. 기본소득은 대상 집단의 동질성이 강할수록 설득력을 지닌다. 현재 아동·청년·장애인·노인·농민 등 사회수당형이 주요 방안으로 등장한 이유다. 만약 대다수 사람이 노동하지 않는 사회가 도래하면 완전 기본소득은 필요할 것이다. 그게 언제일까? 지금이 그때는 아니라는 판단이다. 그렇다면 논의할 주제는 분명하다. 어떤 사회수당형을 도입할지, 의료·보육·요양·주거 등 사회서비스 복지와 어떻게 균형을 이룰지, 복지가 더 필요한 취약계층을 위해선 무엇을 보완할지 이야기해야 한다. 기본소득을 상상하되 지금은 복지체계를 촘촘히 보강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기자명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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