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답지 못하다’고 학창 시절 별명이 ‘미스 김’이었던 김현 시인은 소수자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본다. 새 연재 ‘김현 살다’에서 은근하게 포착한 삶의 결을 전한다. 지난주에 게재된 ‘은유 읽다’와 함께 격주로 독자들을 만난다. 김현 시인의 글은 좀 더 삶에, 은유 작가의 글은 좀 더 책에 밀접하게 다뤄질 예정이다.


밤마다 쌍화탕을 먹는다. 이맘때면 매해 챙기는 일이다. 약이 좋은 건지 약발이 잘 받는 몸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쌍화탕을 먹고 난 다음 날 아침이면 기운이 사뭇 다르다. “사내답게” 뿌듯해질 일 같지만, 건강해진 느낌이 들어 인간적으로 뿌듯하다. 아침에는 씩씩하고 담백해지고 싶다. 그때의 몸 상태는 하루를 좌우하고 하루를 잘 살아내는 일이 한 달을, 한 해를 좌지우지한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의 성기를 가진 신체의 아침 발기란 정확히 고만고만한 일이다. 한약을 먹으니 발기가 남다르다며 밤일에 기여하겠다고 직장동료나 친구에게 말을 꺼내는 순간 남성은 복잡해지고 어쩐지 연약해진다. 행복하자, 우리.

얼마 전, 출근길 지하철에서였다. 50대 초반쯤 되어 보이던 남자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신음을 내고 있었다. 끙끙 앓는 소리는 아니었으나 긍긍 앓는 소리였다. ‘저이에게 어젯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조용히 고개를 돌려 앞을 내다봤다. 앓는 얼굴을 똑바로 보는 건 무례한 일이다. 나는 앞에 앉은 사람의 신발을 들여다보며 앓는 소리를 들었다. 숙취가 남은 소리라기보다는 노동의 고단함이 남은 소리였다. 아픈 소리라기보다는 아플 것 같은 소리였고 들켜서는 안 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흘려 내보내는 소리였다. 50대, 중년 남성, 가장의 고단함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가 아니라 먹고사는 노동자를 떠올리게 하는 소리였다. ‘저이 몸도 다 됐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하는 소리. 그러나 저이도 출근을 완료하고 자양강장제 한 알을 챙겨 먹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시작한 후에 점심에는 동료들과 알탕을 먹는 생활로 자신의 노동력이 아직 살아 있음을 공공연하게 증명해야 할 것이다. 어쩐지 복잡하고도 연약한 남자를 생각하게 되었다. 행복하자, 우리.

 

 

 

ⓒ시사IN 윤무영

 


복잡하고도 연약한 남자를 생각할 때 역시 빠뜨릴 수 없는 건 내 아버지다. 수십 년 군인으로 살았던 아버지는 정년퇴직 이후 표 나게 지금 자신의 어딘가가 비어 있다는 것을 자식들에게, 특히 아들인 나에게 드러내 보였다. 용건 없이도 전화를 자주 했고 서울로 올라와 괜히 극장에 가거나 풍물시장 같은 곳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버지는 엄마의 억척스러운 기운을 간혹 무거워했고, 명절이면 나와 부자지간으로서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을 공유하고자 했으나 번번이 실패해 술에 지고는 했다. 그때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온 앓는 소리는 깨끗한 것이 아니라 텅 빈 것이었다. 우연히 아버지가 서랍 속에 감춰 두었던 ‘남자의 약품’을 발견하고는 ‘귀여워!’ 하다가도 한편 스산한 마음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가 상실한 것은 무엇일까. 아버지에게 인생에 다시없을 공허를 안겨준 건 어떤 것이었을까. 후에 나는 아버지가 자신의 남성성을 여전히 노동력으로 증명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오래 일했으면서도. 아버지에게는 또다시 일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일용직 근로를 하는 가운데 돈을 다시 벌어오면서 순간, 씩씩하고 담백해졌다. 긴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지금도 종종 짧게나마 근로자가 되곤 하지만, 아버지의 몸도 이제 다 되었다.

마음의 발기 대신 몸의 발기를 기대하며

오늘도 쌍화탕을 먹었다. 마음의 발기 대신에 몸의 발기를 먼저 기대했다. 최근 들어서 나는 점점 마음이 아니라 몸을 우선으로 신뢰하기 시작했다. 그건 몸을 먼저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앓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한 삶이란 역시 몸부터 씩씩하게 만드는 것이다. 몸이 담백해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씩씩해진다. 복잡하고 연약한 아버지와 50대 노동자와 발기하는 신체에 인생을 거는 남자들을 두루 살필 수 있다. 그런 남편과 자식을 둔 여성의 사무치는 심정과 차별 없는 가족 구성권에 대해서도. 발기하는 몸이 저지를 수 있는 죄와 그 죄를 어떻게 처벌해야 할지, ‘합의하에’ ‘명예훼손’이라는 말이 얼마나 거짓될 수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동료에게 “쌍화탕 한번 먹어봐, 인간다워지더라”라고 권유할 수 있고 비록 긴 시간 불효자식이었을지라도 오랜 세월 노동하며 살아온 부모의 성생활을 새삼 응원할 수 있고 무엇보다 누군가의 앓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나 역시 파트너에게 쌍화탕을 권유하지 않았을 것이다. 앓는 소리는 내 몸의 소리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싹트는 소리이다.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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