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 기자·구글 뉴스랩 펠로십 씨모어(SeeMore)팀 (권자경·김민수·김지원·이다원)

 

 

 

2월4일 토요일, 한 70대 남성이 태극기를 들고 서울 광화문광장을 향해 느릿느릿 걸었다. 촛불집회가 열리는 세종대로 사거리에 도착했다. 누가 봐도 충돌이 예상되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저쪽으로 가세요”라며 그를 말렸다. 그는 촛불을 든 시민들과 잠시 승강이를 벌이다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거리로 나오게 됐는지, 왜 이곳까지 걸어왔는지 물었다. 그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한테 뭘 물어보지 말고, 이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봐.” 가방 속에서 꺼내든 A4 용지에는 손으로 쓴 글씨가 가득했다. 서석구, 변희재, 황장수, 장경순…. 개인 이름과 단체명, 그리고 휴대전화 번호 등 연락처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현장에 자주 나오는 사람들은 이 종이를 서로 복사해 나눠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름과 이름 사이, 종이 여백에는 ‘애국적인 경구’가 적혀 있었다. “행동 없이 말로만 하는 애국은 허공으로 날아간다.” “말로는 태산도 옮긴다.” 시청 앞으로 돌아가던 그가 한마디를 남겼다. “언론은 믿을 게 못 돼. 진실은 유튜브에 있어.”

 

ⓒ연합뉴스


“계엄을 선포하라” “국회를 해산하라”

서울시청 건너편, 덕수궁 대한문 앞은 상징적인 공간이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죽은 동료들 분향소를 세운 곳도,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당시 경찰의 강제 진압에 시민들이 쫓겨 밀려난 곳도 900㎡ 크기 남짓한 이곳이었다. 이번 탄핵 정국에서는 보수 단체가 대한문 앞을 점령했다.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 참석자가 재차 100만명을 넘긴 지난해 12월24일까지, 대한문에 모인 탄핵 반대 인파는 쉽사리 세종로를 건너기가 어려웠다. 광장으로 나온 사람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 어려운 일이 한 달 만에 일어났다. 지난 1월21일,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한 인파는 시청 앞까지 흘러넘쳤다. 설 연휴 직후인 2월4일 집회에는 낯익은 정치인도 다수 등장했다. 친박 핵심 인물인 김진태·조원진 자유한국당 의원이 연단에 올랐고, 윤상현 의원과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도 모습을 드러냈다(18~20쪽 기사 참조). 집회 참가자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며 “계엄을 선포하라” “국회를 해산하라”고 주장했다.

행사를 주최한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는 2월4일 탄핵 반대 집회 참석 인원이 130만명에 달했다고 주장했다. 과장된 숫자다. 같은 날 훨씬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광화문 촛불집회 참석자만 해도 주최 측 추산 40만명 정도였다. 그럼에도 탄기국 집회 참석자가 지난 1월부터 급격히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들 사이에서 광장을 차지한 자신감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지난 1월21일 이들은 아예 서울광장에 천막을 세우고 ‘진지전’에 돌입했다. 서울시는 광장 사용에 대한 서울시조례 위반이라며 철거하라고 했지만, 탄기국은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세월호 유가족들의 천막이 철거될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다.

 

 

 

2월4일 광화문광장에서 만난 한 70대 남성이 가방 속에서 꺼내 보여준 A4 용지에 적힌 내용들. 서석구·변희재·황장수 등 보수 논객 연락처와 ‘애국적인 경구’가 적혀 있다.

 


20일 넘게 계속되는 농성장에는 주로 60대 이상 노인들이 모여들었다. 보수 단체 집회에서 흔히 본 낯익은 풍경이 일상화되었다. 군복을 입은 노인이 상황실을 지휘하고, 천안함·연평해전 희생자 분향소가 마련된 천막에는 대형 성조기가 매달렸다. 식당, 휴게실, 상황실, 프레스센터 등으로 쓰이는 각 천막에는 영어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현장에는 지나가는 외국인들에게 집회 취지를 설명하는 통역 스태프가 ‘English Staff’라는 명찰을 달고 상주하고 있었다. 2월9일 시청 앞 광장에서 만난 한 통역 스태프는 “시청 앞 텐트에서 먹고 자며 외국인들에게 탄핵의 부당함을 설명하고 있다. 딱히 씻을 만한 장소가 없어서 이틀에 한 번꼴로 목욕탕에 다녀오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가 지나가던 외국인에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자, 다른 농성 참가자가 다가와 갑자기 소리쳤다. “위 얼 트루 패트리엇츠 오브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We are true patriots of Republic of Korea:우리가 대한민국의 진짜 애국자다).”

서울광장의 ‘진지전’을 비롯해 탄핵 반대 집회라는 ‘기동전’에 나서는 이들의 중심에는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있다. 집회를 주최하는 탄기국 역시 박사모가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다. 하지만 집회 참석자들은 스스로를 박사모가 아닌 탄기국 회원이라 부른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만난 한 탄기국 관계자는 “박사모가 부각되면 지나치게 편향적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온라인 네트워크로 집회와 농성 현황을 공유하고, 카카오톡 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서고 있다.

집회 참석자들 대다수는 진보 언론뿐 아니라 조·중·동 등 보수 언론에 대해서도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2월16일 시청 앞 농성장에는 “〈조선일보〉 반드시 폐간시켜야 하는 이유” “조·중·동 찌라시의 종착지는 똥칸이다”와 같은 글귀가 쓰인 플래카드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농성장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는 출입 가능한 언론사가 따로 명시되어 있다. 〈프리덤뉴스〉 〈뉴데일리〉 〈노컷일베〉 〈미디어워치〉 등이다. 이들 사이에서 변희재 〈미디어워치〉 전 대표가 매주 집회의 시작을 알리는 핵심 연사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집회가 시작될 때마다 변 전 대표가 가장 먼저 연단에 올라 JTBC에 대한 소송 진행 상황을 보고한다.

 

 

 

 

ⓒ연합뉴스2월4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 주최로 열린 ‘탄핵 무효! 태극기 애국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언론을 불신하는 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미디어는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다. 특히 신혜식 전 〈독립신문〉 대표가 만든 유튜브 채널 ‘신의 한수’는 박사모 회원 사이에서 필독 채널로 통한다. 박사모 카페에서도 ‘신의 한수’를 찾아보는 방법을 묻는 글과, 이를 설명하는 댓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유튜브를 검색하시고, 사이트에 들어갑니다. 그런 다음 유튜브 검색창에 ‘신의 한수’를 치세요. 가운데 빨간색 ‘구독’ 버튼을 누르면 됩니다.” 인기 비결은 현장 중계다.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지지층은 유튜브 채널에서 현장 중계를 시청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2월8일 시청 앞 농성장에서 만난 한 70대 여성은 “추운 날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나마 건강한 사람들이다. 마음은 있지만, 몸이 불편해서 나오지 못하는 노인들이 훨씬 많다”라고 말했다.

SNS 통해 ‘그들만의 정보’와 ‘믿음’ 공유

이들은 주로 카카오톡, 네이버 밴드, 카카오스토리 등으로 ‘그들만의 정보’와 ‘믿음’을 공유한다. 유튜브에 올라가지 않은 일부 영상은 파일째로 회원들 사이에서 공유·전송된다. 2월4일에 만난 한 집회 참가자는 카카오톡을 통해 ‘이재명 성남시장의 진실’ ‘황교안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 같은 영상을 직접 전송받는다고 설명했다. 유튜브를 거치는 것보다 카카오톡에서 휴대전화로 직접 영상을 다운받는 게 훨씬 편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최근 MBC 뉴스가 이들의 카카오톡이나 밴드를 통해 자주 공유된다. 2월8일 MBC가 고영태씨의 녹취 파일을 보도하면서, 박사모 내에서 “천군만마를 얻었다”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2월13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야 3당 주도로 MBC 노조 탄압 청문회가 의결되고, 2월14일 MBC가 이에 대해 〈뉴스데스크〉에서 공개적으로 반발하자 MBC에 힘을 보태주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박사모 집행부도 2월17일 회원 전원에게 전날 MBC가 보도한 고영태씨 녹취 관련 기사 링크를 문자메시지로 전송했다.

박사모와 탄기국 밴드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씩 탄핵 반대 게시물이 올라온다. 이 같은 게시물은 부정확하고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 많다. 2월16일 한 박사모 회원은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월13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이영훈 대표회장(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과 만난 기사를 거론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가 문재인에게 ‘대통령이 되면 통합을 이끌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로 이 목사는 북한 김정은의 종노릇 하는 간첩이고 가짜 사탄 목사다.”

 

 

 

 

ⓒ시사IN 신선영보수 단체들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를 주장하며 서울광장에 무단으로 설치한 천막과 텐트.

 


박사모 다음 카페에는 한 회원이 탄핵 국면에서 지식인들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며 고 신영복 교수의 〈강의〉 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개신교계 대표적 보수 인사인 이 대표회장이 간첩 취급을 받으며, 반대로 진보 학자인 신영복 교수의 글을 박사모 회원이 격언으로 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농성장에 나온 이들은 야당에 대한 성토보다 탄핵소추안 통과를 주도한 바른정당 김무성·유승민 의원에 대해 더 강도 높은 적대적 발언을 쏟아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자신의 개인사와 가족에 대해서는 입을 닫거나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평일 농성장을 지킨다는 한 탄기국 관계자는 “손자를 볼 낯이 없다. 내가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켜서 자식 내외가 촛불집회에 나가더라. 직장에서 (촛불집회에) 나가라고 시킨 건지 모르겠지만, 절대 그런 말(탄핵을 촉구하는 발언) 어디 입 밖에 꺼내지 말라고, 큰일 난다고 얘기했다. 다 내가 잘못 교육시킨 탓이다”라고 말했다. 2월11일 집회에 참석한 한 70대 남성은 “어른들이 현혹되어 중심을 잡지 못하니, 아이들이 나이 먹은 사람들을 싫다고 하는 것 아니겠냐”라고 말했다. 탄핵 정국에서 도출된 세대 갈등의 원인을, 이들은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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