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야마 아이키치는 참치잡이 어선의 무선장이었다. 고기를 잡다가, 거대한 불꽃을 보았다. 귀를 찢는 폭발음에 이어 눈처럼 생긴 게 하늘에서 내렸다. 정말 눈일까 싶어 그는 하얀 가루를 혀로 핥아보았다. 저녁이 되자 선원들은 구토와 설사를 시작했다.

보름 뒤 니시와키 야스시 오사카 시립대학 의학부 교수는 시청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피폭된 참치를 시장에 방출해도 좋은지 조사를 해달라.’ 니시와키 교수가 배에 남은 흰 재를 조사해보니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던 강한 방사능이 확인되었다. 구보야마는 1954년 3월1일 일본에서 54㎞ 떨어진 남태평양 비키니 섬 근처에서 조업을 하다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에 피폭당한 것이다.

니시와키 교수는 가만있지 않았다. 후원금을 받고 자비를 보태 1954년 7월 영국을 시작으로 프랑스, 노르웨이, 스웨덴, 벨기에를 순회하며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을 고발했다. 그의 폭로는 전 세계의 양심을 깨웠다. 니시와키 교수는 반핵운동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런 그가 2년 뒤 극적인 변신을 한다. 에너지 자원이 부족한 일본이 원자력 발전을 이용해야 한다며 원자력 옹호자로 나선 것이다. 지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그의 변신은 물리학계 후배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50여 년 뒤 은퇴한 그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재앙을 목도한다. “피난 구역을 20㎞가 아니라 50㎞까지 하지 않으면 안 돼.” 이 한마디만 아내에게 남기고 그는 식사를 거부한다. 후쿠시마 원자력 사고 발생 16일 뒤 그는 생을 마감한다(〈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니시와키 교수가 떠오른 건 교수들의 몰락을 보면서다. 박근혜 게이트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낱낱이 보여주었다. 특히 교수 사회의 권위는 붕괴됐다. 구속된 안종범·김종·김종덕 등은 캠퍼스에서 전문가로 대접받던 학자들이었다. 이화여대 류철균·남궁곤·김경숙·이인성 교수가 구속된 데 이어 최경희 전 총장도 조만간 구속영장이 청구될 것으로 보인다. 단일 사건으로 이렇게 많은 교수가 한꺼번에 구속된 것은 아마 처음일 것이다.

교수들의 정치 참여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도 있다. 전문성을 정책으로 현실화한다면 ‘배워서 남 주는’ 효과를 낸다. 다만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어제까지 권력을 누리다가 오늘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이들을 ‘폴리페서’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권력자의 심부름을 충실히 수행한 ‘뽀이페서’나 대학을 비선 실세에게 송두리째 바치다시피 한 이들이, 학생들에게 후배 교수들에게 사과나 반성을 했다는 소리는 아직 듣지 못했다.

니시와키 교수는 후쿠시마 원자력 사고에서, 피폭 6개월 만에 숨진 구보야마를 떠올렸을 것이다. 자신의 변신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는 책임을 졌다.

기자명 고제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