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 전에 미국에서 들려온 뉴스가 있었어. 미국 정부가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지나는 송유관 노선 건설을 포기한다는 선언이었지. 노스다코타와 사우스다코타, 아이오와와 일리노이 등 미국 4개 주를 관통하고 길이만 1200마일(약 2000㎞)인 이 송유관 공사를, 인디언들은 9개월 동안 물대포를 맞고 경찰에 체포되면서 자신들의 성지이자 식수원을 오염시킨다는 이유로 저지해왔단다. 마침내 미국 정부와 미군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재검토하고 대체 경로를 탐색할 것”을 결정했어. 그런데 이 뉴스가 들린 며칠 뒤 아빠는 그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인상 깊은 뉴스를 접해. 전 4성 장군 웨슬리 클라크의 아들이자 역시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인 웨슬리 클라크 주니어를 비롯한 미군 참전 용사 100여 명이 인디언들 앞에서 사죄문을 발표했다는 소식이었지.  

“먼저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겠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바로 여러 해 동안 여러분에게 상처를 안긴 부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곳에 와서 여러분과 싸웠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우리는 조약에 서명하고도 이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중략) 우리가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당신들의 아이를 빼앗고, 신이 주신 당신들의 언어를 빼앗고 말살하려 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존중하지 않았고 당신들의 땅을 오염시켰습니다. 이제 사죄의 뜻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용서를 구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웨슬리 클라크 주니어와 예비역 미군들은 무릎을 꿇고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렸어. 그 위로 인디언들 특유의 환호가 흐르고 무릎 꿇은 사람들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The Huffington Post2016년 12월5일 미군 참전 용사들이 인디언들 앞에서 인디언 학살에 대해 사죄하고 있다.
아빠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운디드니라는 곳을 떠올렸어. 미군 참전 용사들이 무릎 꿇은 곳에서 멀지 않은 사우스다코타 주에서 일어난 수족(라코타족) 인디언 학살 현장이야. 운디드니 학살은 1890년 12월29일에 일어났어. 수족은 인디언 가운데 가장 용감한 부족 중 하나였고 교만한 정복자였던 카스터 장군의 미군 기병대를 전멸시킨 리틀 빅혼 전투의 승리자였지. 그러나 압도적 군사력 앞에 수족은 굴복했고 백인들이 정한 ‘보호구역’에 갇히게 됐어. 그런데 그들 사이에 ‘망령의 춤’이라는 게 유행해. “예수가 인디언으로 세상에 돌아왔다. 수많은 들소들이 돌아오고 죽어간 이들의 망령이 살아나리라”는 예언 속에 인디언들은 미친 듯이 춤을 추었고 이를 불온한 소요로 간주한 백인들과 충돌했어. 그 와중에 인디언 지도자 ‘앉은 소’가 죽었고 인디언들은 춤을 출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섰지. 보호구역을 이탈한 거야.

미국 기병대는 인디언들을 따라잡아서는 운디드니 샛강 기슭의 기지로 연행하고 무장 해제에 나서. 총기는 물론 도끼, 심지어 천막을 짓는 기둥까지도 내놓으라고 강요했지. 남자 120명, 여자와 아이들 230명의 인디언들이 빈약한 무장을 내놓는 와중에, 한 젊은 인디언 전사가 총을 머리 위로 쳐들었어. “이건 내가 비싼 돈 주고 산 거니까 내 거라고!” 그는 청각장애인이었다고 해. 그저 한번 흔들고 내려놓을 것 같았지만 미군과의 승강이가 벌어졌고 오래지 않아 총성이 울렸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인디언을 향해 설치되어 있던 기관총들이 불을 뿜었고 인디언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꽂히는 총알에 쓰러지기 시작했어. 인디언 350명 가운데 300여 명이 죽었어. 미군도 25명이 전사했는데 그 대부분은 인디언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쏘아 갈긴 자기 동료의 총탄에 맞아 죽은 거였어. 이게 운디드니 학살이야.

이 이야기를 들은 뒤 다시 미군 참전 용사들의 참회를 읊조려보렴. 그들이 저지른 죄도 아니고 그 조상의 범죄이건만 그들의 진실한 회개는 그를 지켜보는 모든 지구상 인류의 가슴을 찔렀고 그들의 머리 위에 놓인 한 백발 인디언의 손은 마치 모든 죄를 사하시는 하늘 위 저분의 축복처럼 아빠의 머리도 뜨겁게 하더구나.  

ⓒAP Photo1972년 네이팜탄을 맞고 3도 화상을 입은 9살 킴 푹(가운데)이 울부짖고 있다.
다른 이야기 하나. 베트남 전쟁 와중에 찍힌 유명한 사진이 있어. 폭격당한 마을에서 아이들이 울부짖는 가운데 한 알몸의 소녀가 두 팔을 벌린 채 달리는 사진. 발가벗은 목덜미와 등, 팔은 이미 3도 화상을 입고 있었지. 소녀의 이름은 판티 킴 푹. 소녀는 병원으로 실려 가지만 무려 17차례의 수술을 견뎌야 했다. 후일 우여곡절 끝에 캐나다에 정착한 그녀는 기독교에 귀의해 우리나라 말로 하면 ‘간증자’로 명성을 쌓아. 퓰리처상에 빛나는 사진 속의 ‘베트남의 소녀’였으니 그 덕도 보았겠지. 그런데 1996년 재향군인의 날 미국 워싱턴을 찾은 그녀는 한 특별한 방문자와 만나게 돼. 바로 운명의 그날 마을에 네이팜탄을 퍼부었던 폭격기 조종사 존 플러머였어.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킴 푹의 사진이었다고 해. 스틸 사진 속 소녀가 울부짖는 소리가 그를 괴롭혔고 사진 속에서 뛰어나와 자신에게 달려드는 듯한 환영에 시달렸지. 24년 동안 그는 괴로움 속에서 살았어. 두 번의 결혼도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술 없이는 못 사는 폐인이 되어버렸다는구나.  킴 푹의 방문 소식을 들은 그는 그곳으로 달려가 그녀의 연설을 듣는다.

24년 동안의 고통이 2분간의 대화로 사라졌다

“화상 때문에 아직도 고통스럽지만 이젠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저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을 겪으며 죽어갔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날의 사진 속, 내 뒤에선 수천명이 죽었고 신체를 잃은 사람들도 즐비했습니다.”

이 말을 듣던 존 플러머는 미친 듯이 사람들 숲을 뚫고 앞으로 달려 나가. “접니다. 제가 당신 마을을 폭격한 사람입니다.” 스물네 해 자신을 뒤덮어온 죄책감을 떨어버리려는 듯 그는 계속 반복해서 외쳤어.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이제는 소녀적 모습이 거의 남지 않은 킴 푹은 이렇게 대답했어. “괜찮습니다. 벌써 다 용서했어요.” 야수와 같은 전쟁의 끄트머리에서 만났던,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볼 일이 없었을 베트남 여자와 미국인 남자는 서로에게 준 상처를 씻고 보듬으며 용서하고 화해해. 플러머는 24년의 고통이 그 2분간의 대화로 깨끗이 사라졌다고 토로했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바란다는 건 단순한 의식(儀式)이 아니야. 으레 치러야 할 의무도 아니고 단순히 거쳐야 할 절차도 아니야. 죄인들의, 가해자들의 말라붙은 가슴 속 양심의 더운 물줄기를 찾아, 차가운 자기 합리화의 벽을 부수고 냉기 넘치는 이기심을 쓸어내는 일이고, 피해자에게는 한 사람을 새롭게 했다는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이야. 즉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구하는 일이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들의 죄를 처절하게 인식하고 숨김없이 고백하는 과정이 필요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죄인이란 온전한 사람이 아닌 죄에 물든 육신일 뿐이지.

지난해 말 이후 우리는 국회 청문회장에서, 또 언론의 마이크 앞에서, 기타 여러 경로로 정말 추한 육신들을 여러 번 목격했다. 한때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뭇 학생들에게 참되거라 바르거라 훈계하고, 애국을 하네 봉사를 하네 했던 주제에, 그 뒷구멍으로는 구린내 나는 죄악의 실을 뿜어내던 독거미 같은 육신들을 말이야. 그들은 결코 깨닫지 못할 거야. 조상의 죄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는 저 미국 참전 용사들의 결기를, 한 소녀의 삶을 망친 죄책감에 수십 년을 시달리다가 피해자를 만나 소리 높여 용서를 구했던, 마침내 한 인간이 용서를 얻은 자유의 달콤함을 말이다. 예수는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얘기했으나 그는 신의 아들이고 아빠는 사람의 아들이라, 이렇게 기도하는 바야. “저희를 사하지 마옵소서. 저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도 모른 체하나이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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