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꿈이었다. 꿈속에서 미쓰하(가미시라이시 모네)는 ‘다키’라고 불렸다. 도쿄의 잘생긴 남학생이었다. 제대로 된 카페도 있고 서점도 있고 치과도 있고 모퉁이마다 24시간 편의점이 있는, 산골 소녀 미쓰하가 늘 동경해 마지않던 바로 그 동경(東京·도쿄)에 살고 있었다. “이런 마을 싫어요. 이런 인생도 싫어요. 다음 생에는 도쿄의 꽃미남으로 살게 해주세요!” 전날 저녁 마을 신사(神社)를 나서며 허공에 대고 외친 실없는 소원을 꿈에서나마 이루어주셨나 보다, 미쓰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키(가미키 류노스케)의 꿈은 더 이상했다. 꿈속에서 ‘미쓰하’라고 불렸다. 제대로 된 카페도 없고 서점도 없고 치과도 없는 데다 명색이 편의점인데 밤 9시만 되면 문을 닫아버리는, 어느 두메산골의 여학생이 되어 있었다. 전날 저녁 허공에 대고 실없는 소원을 외친 적도 없는데 그리되었다. 참 이상한 꿈도 다 있네, 다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춘기 남학생이 여자 몸으로 들어가 봉긋한 자기 가슴을 마음껏 주물러볼 기회였으니, 딱히 싫어할 이유도 없는 꿈이었다.


하지만 꿈에서 깬 뒤에는 기억나는 게 없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는 막연한 느낌만 남았다. “오늘은 멀쩡하네” “어제는 너 정말 이상했어” “그날 너 귀신 들렸던 거지?” 친구들은 자꾸 이렇게 얘기한다. 어쩌면 그게 꿈이 아닐 수 있다는, 실제 다른 사람 몸에 들어갔을지 모른다는, 그게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수시로 반복되는 것만 같다는 의심이 싹튼다. 결국, 사라지는 기억을 대신해 기록을 남겨보기로 하는 두 사람. 손바닥에 각자 이름을 적는다. 그리고 아침을 맞이한다. 역시 그랬다. 꿈이 아니었다. 시골 소녀 미쓰하와 도쿄 소년 다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꾸 몸이 뒤바뀌고 있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의 시작은 이러하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처럼 남녀의 몸이 바뀌는 흔한 설정에 기대어 즐겁고 발랄한 하이틴 로맨스를 펼쳐낸다. 서로 마주칠 일 없는 공간에 따로 살고 있으므로 둘이 만나 티격태격하는 에피소드는 없지만, 서로 마주칠 일 없다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둘 사이에는 오히려 더 애틋한 감정이 쌓여간다. 내 몸 나눠 쓰는 그를 한번 보고 싶고, 내가 빌려 쓰는 이 몸의 주인을 꼭 만나고 싶은 두 사람. 한 번도 본 적 없는 누군가를 매일 그리워하며 살던 미쓰하와 다키가 마침내 서로를 찾아 나서는 후반부. 그때부터 영화는 더 이상 하이틴 로맨스가 아니다. 마냥 즐겁고 발랄한 연애담이 아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시간의 경계를 넘고 공간의 한계를 지우며 이야기의 가파른 굴곡을 오르는 영화. 그렇게 한발 한발, 어떤 안타까움의 까마득한 경지에 이르러서야 복받친 울음처럼 토해내는 라스트신. 사라지고 멀어지고 잊혔던 모든 것들이 다시 되살아나 관객의 마음 위로 별처럼 쏟아져 내리는 클라이맥스. 그들도 우리처럼 거대한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구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에 더 가슴 아픈 일본의 회한이 영화 후반부를 채운다. 구하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잊힐지 모른다는 두려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그 회색빛 감정에 형형색색의 판타지를 묶어 예쁘고 단단한 매듭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래전, 고정희 시인이 그랬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그 쓸쓸하게 남겨진 여백이 더 이상 쓸쓸하지 않도록,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찬란한 그림을 꽉꽉 채워 필생의 역작을 완성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 영화가 끝나자마자 그대로 처음부터 다시 보고 싶어지는 영화. 나에겐 최근 딱 두 편이다. 〈라라랜드〉 그리고 〈너의 이름은〉.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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