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나는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 직후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이라는 단행본을 냈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작가가 되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출판에 대해 아는 바도 없었다. 그럼에도 무모하게 단행본을 펴내겠다는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건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 〈멀고도 가까운〉을 읽은 덕분이다.

올해 2월에 출간된 〈멀고도 가까운〉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다. 반가워할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나는 이야기를 붙들고 살았고,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찾으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고, 이야기에서 이야기로 이동하며 다른 삶을 찾아다니다가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리베카 솔닛 역시 페미니스트다. 저자는 살구, 엄마와 자신의 관계, 아이슬란드에 대해 자신이 올라탔거나 압도되었거나 매혹된 이야기에 대하여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뽑아낸 실로 이야기를 자아낼 때, 단단히 직조해낸 이야기가 새로운 공간이 되고, 그렇게 지어 올린 공간은 또 다른 누군가가 딛고 사는 삶이 된다고 말한다.

이번에 그 누군가는 바로 나였다. 겨울 내내 나는 솔닛의 이야기가 꿰매어놓은 세상을 따라 정처 없이 걸었다. 그리고 얼음이 모두 녹은 늦봄이 되었을 때, 나는 새카맣게 녹슨 나의 물레에 드디어 손을 얹었다. 나는 솔닛의 바느질을 이어받은 기분을 안고 여름 내내 글쓰기를 쉬지 않았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이 마치 바늘 한 땀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던 저자의 문장을 자꾸만 되뇌면서. 바깥에서 안으로만 들어오던 이야기의 방향을 안에서 바깥으로 돌릴 수 있었다.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반비 펴냄
내가 이어받은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불러오면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용기 내어 처음으로 자신의 물레에 손을 얹는 사람들이 실을 잣고 공간을 지어 올렸다.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따라, 우리는 이동하고 확장되고 변화했다. 유독 수많은 정의가 존재하는 단어이지만 내게 페미니즘은 결국 이야기다. 세상이 나의 품에 안겼던 익숙한 이야기를 내려놓고, 낯설지만 친숙한 이야기를 끌어안으려 팔을 벌릴 때, 떠도는 이야기를 거부하고 내 안에 담긴 이야기를 한 올씩 뽑아내보기로 결심할 때, 페미니즘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 책은 엄마와 자신과의 관계를 다루지만,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쩌면 페미니즘 도서라 부르기에는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페미니즘은 결국 이야기이므로, 그리고 페미니스트라면 새로운 이야기를 따라 서로를 구원하고 용기를 불어넣으며 가능성을 열기 마련이므로 망설임 없이 권한다.

기자명 이민경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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