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초기작 〈어둠 속의 웃음소리〉의 원래 제목은 ‘카메라 옵스쿠라’였다. 〈세계미술용어사전〉(월간미술)의 정의에 따르면 “빛을 투사할 수 있는 조그만 구멍을 가진 밀폐된 방이나 상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구멍을 통해 투사된 빛이 반대편 벽면에 사물의 역전된 상을 재역전시키기 위해서 흔히 거울을 사용”하는 기구를 뜻한다. 카메라의 조리개라든가 영화관 등의 초기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 알비누스는 그 카메라 옵스쿠라 안에 포박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그 안에서 상영되는 어떤 극(이를테면 격렬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마르고트와 렉스의 잔인한 사랑놀음을 눈앞에서 뻔히 보면서도 그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관객이었으며, 혹은 신이나 운명이 지휘하는 장중한 드라마가 아니라 차갑고 영리한 무대감독 렉스가 꾸민 희극 속에서 혼자 감상에 젖어 있는 어리석은 주인공(그리하여 ‘어둠 속의 웃음소리’를 뒤집어쓰는)에 불과했다.
“여섯 달 전에 나는 마르고트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모범적인 남편이었어. 운명은 그걸로 재빨리 작품을 만들어놓았어! 다른 남자들 같으면 행복한 가족생활과 작은 간통을 결합했겠지만, 내 경우는 모든 게 즉시 박살났어. 왜?”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는 알비누스는 그렇게 스스로를 끊임없이 기만하고, 마르고트와 렉스의 끈적한 부도덕과 탐욕에 자신의 ‘순수한’ 필터를 덧씌워 가짜 환상의 만족감에 안주한다. 결국 몰락은 필연적으로 닥쳐온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치정극이자, 미술과 영화라는 ‘예술’을 둘러싼 메타 교양극. 알비누스는 미술에 대한 자신의 감식안과 교양을 굳건하게 믿었지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전공이 “예술에 대한 열정”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서글픈 자각이, 지독한 조롱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