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난 지 4년이 흘렀는데 사회는 여전히 매우 혼란스럽다. 많은 상류층 사람들이 몰락해서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고 거리에는 어려운 처지의 상이군인이 흔하다. 퇴역 군인은 구걸을 하다가 거절당하자 “너희는 편히 잘 살았잖아. 빌어먹을 여자들” 하고 욕을 한다. 여성들의 사회참여는 매우 활발해졌지만 여성참정권 운동(suffragette)은 일부분만 성공했다. 30세 이상 일정 수준의 재산을 소유한 여성들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공원에서 마주친 남자는 여자들을 꼬드기려다 퇴짜를 맞자 ‘여성참정권 운동가’냐며 비아냥거린다.

이 모든 혼란은 주인공이 예상했거나 원했던 바가 아니다. 그녀가 바란 건 ‘세상을 바꾸고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이었다. 변화를 원했지만 전쟁을 바라지는 않았다. 전쟁을 마치 ‘무슨 위대한 모험쯤으로’ 생각했다. 참전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아들들을 억지로 전쟁에 내보낸 아버지는 자식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는 무력하게 안락의자에 박혀 있다가 무책임하게도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아버지의 투자 실패로 인한 열악한 재정 상황과 평생을 상류 계층의 안주인으로만 살아와서 아무런 생활 능력이 없는 어머니와 거대한 저택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주인공 몫이다. 이제 겨우 스물여섯 살이지만 스스로 노처녀라 느끼는 프랜시스의 인생에 다른 어떤 흥미롭거나 새로운 일이 펼쳐질 것 같지는 않다. 돈 때문에 세간의 눈을 무시하고 자존심도 저버린 채 저택의 2층에 젊은 세입자 부부를 들일 때까지는 그랬다.

세라 워터스의 〈게스트〉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당시의 사회 상황

〈게스트〉
세라 워터스 지음
김지현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이나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지금의 한국 사회와 그리 다르지 않다. 강고하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계층은 온통 뒤섞였다가 다시 슬슬 재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계층이 형성되는 참이고, 더 이상은 그렇게 지탱될 수 없음에도 사회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다. 아니, 구세대가 자기들이 알던 세상을 그대로 이어 나가려고 애쓰는 참이라고 해야겠다.

이런 세상에서 주인공들은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고 몰래 담배를 나누어 피우고 같이 산책을 하며 좋아하는 책에 대한 감상을 공유하고 가사일을 서로 나누고 뜻밖의 동지애를 느끼면서 계층과 배경과 경험을 넘어선 우정을 쌓아간다. 이 예상치 못한 우정은 어쩌면 당연히도 곧 사랑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들의 사랑이 격정과 불안과 불신과 질투와 위기를 겪게 되는 것은 보통의 사랑과 다를 바 없지만, 이 사랑에 같이 겪어내야 할 살인의 기억이 끼어드는 점은 다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둘은 동성이다. 읽을거리가 풍부하고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소설인데, 동성 간의 사랑이라는 것만으로 다른 눈으로 본다면 그건 좀 아까운 일이지 싶다.

기자명 김세정 (영국 GRM Law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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