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어마한 그림을 그렸어
  • 최정선 (어린이책 편집·기획자)
  • 호수 485
  • 승인 2017.01.06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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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갓도 꽃이 핀다. 당연하지만 새삼스럽다. 쑥갓 하면 그저 쌈으로 먹고 나물로 먹고 탕에 띄워 먹는 향 짙고 쌉싸래한 잎줄기만 떠오르니 말이다. 하지만 쑥갓은 잎도 있고 줄기도 있고 뿌리도 있고 꽃도 핀다.

할아버지가 마룻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텃밭에 활짝 핀 노란 쑥갓 꽃을 한 다발 꺾어다가 유리병에 꽂아놓고 마주앉은 참이다. 바닥엔 종이가 깔려 있다. 손에는 연필을 들었다. 할아버지는 뼈마디 앙상한 다리를 접어 세우고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꽃을 바라본다. 쑥갓 꽃이야 한두 번 본 게 아니건만 막상 그림을 그리려니 “정말 보통 문제가 아니다”. 아이고, 이걸 내가 그릴 수 있으려나.

<쑥갓 꽃을 그렸어>는 구순 할아버지 유춘하의 그림 도전기를 그의 딸 유현미가 그림책으로 엮은 것이다. 참신한 소재다. 우리 그림책의 품이 얼마나 넓어졌는지 새삼 실감한다. 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가 총인구의 14% 이상)의 문턱에 선 지금, 시사하는 바도 크다.

ⓒ낮은산 제공<쑥갓 꽃을 그렸어>는 작가의 ‘인생’이 담긴 그림책이다.
“내가 구십이라니, 어마어마하다.” 할아버지가 말문을 연다. 아흔 살. 평생 해온 농사일은 이미 손에서 놓았다. 이제는 잘 걷지도 못 하니 누워 쉬는 게 제일 편하겠다 싶은데 딸내미가 자꾸만 스케치북을 들이밀며 성가시게 군다. 난데없이 그림을 그리자니, 황당하다. 그림이라곤 전혀 모르는데.

논일·밭일로 마디 굵어진 손에 쥔 크레파스

딸내미 등쌀에 떠밀려, 그까짓 것 못할 건 또 뭐냐는 심정으로 할아버지는 논일·밭일로 마디 굵어진 손에 빨강 크레파스를 쥐었다. 스케치북에 쓱쓱 긋는다. 그 옆에 초록색을 칠해본다. 파랑색, 노란색, 마음 가는 대로 쓱쓱쓱. 바위도 그리고 토끼도 그린다. 별로 어렵진 않다. “이런 것도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지 원.” 아흔 살 늙은 농부의 그림 수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호미 쥐던 손에 연필과 붓을 쥐었다. 주말농장에서 주워온 자두를 그린다. 수채화는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착실히 길잡이 노릇을 하는 딸 덕에 풋자두 두 알이 그럭저럭 스케치북 위에 자리를 잡는다. “한 번만 하고
<쑥갓 꽃을 그렸어>
유춘하·유현미 지음
낮은산 펴냄
관두기는 아쉬워서” 베란다에 있는 군자란 화분도 슬슬 그려본다. 짙은 초록색 잎에 빨갛게 매달린 열매까지 마음에 쏙 들게 그려졌다. 뿌듯하다.

할아버지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림을 그린다. 쑥갓 꽃을 그리고, 어항의 물고기를 그리고, 북녘 땅 보이는 파주에 가서 임진강을 그리고, 나들이 길에 주워온 공작 깃털을 그린다. 한 장 한 장 그릴 때마다 새록새록 재미가 난다. 새로운 느낌을 맛보고, 뜻밖의 것들을 배우고, 묻어두었던 기억을 꺼내고, 익숙한 것들의 새 얼굴을 발견한다. 나뭇잎에 새겨진 잎맥의 섬세함, 공작 깃털의 오묘한 색감, 아득한 어린 시절, 임진강 너머 그리운 고향, 살아 있는 것들이 뿜어내는 생기, 손바닥을 간질이는 이상야릇한 느낌….

아버지의 그림 스승이자 솜씨 좋은 훈수꾼 딸은 그런 아버지를 그린다. 실향민인 아버지의 목소리를 모으고 아버지의 인생을 모아서 차근차근 그림책에 담는다. 화려하진 않지만 정겹고 제법 어여쁘다. 쑥갓 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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