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페미니즘인가?” 1997년, 일전 불사의 태세로 등장한 잡지 〈이프(if)〉의 창간사 제목이다.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드센 여자 아우라를 풍길 수 있었던 이 잡지는 페미니즘의 필요를 선언하며 뜨거운 시대에 출사표를 던졌다. 1990년대 후반 인터넷 기반으로 끓어올랐던 여성운동은 노골적인 공격에 몰려 고립되고, 페미니스트를 향한 혐오는 외환위기와 군가산점제 위헌 판결 등을 거치며 불붙었다. 페미니즘 잡지나 웹진을 보던 이들은 주변 남성들의 “얼씨구, 너 페미니스트냐? 그럼 나 담배 한 대만”과 같은 조롱에 시달렸다. 담배도, 맞서 싸울 강단도 없던 이들에게 지지와 연대 없는 페미니즘은 현실의 출구가 아니라 무거운 짐이었다. 〈이프〉는 얼마 후 폐간됐고, 페미니즘은 숨을 죽였다. 여전히 열심히 하면 똑같이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세상은 여성들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1997년에 발간된 한국 최초의 페미니즘 잡지 〈이프(if)〉.
그 후 20여 년. 혐오의 광풍과 함께 페미니즘이 돌아왔다. 가부장제의 폭력에 저성장과 경쟁이 만들어낸 불안이 더해졌고, 헬조선의 남성들은 가부장제의 성 역할을 거부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쏟아냈다. 메갈리아가 등장하고, 온라인 플랫폼에서 이것이 나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여성들은 폭발했다. 혐오와 미러링의 격전지였던 SNS는 새로운 연대 방식을 제시하며 오히려 페미니즘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드센 언니’부터 밤길이 무서운 보통의 여성,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남성들까지, 많은 이들이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했고, 출판계도 다시 20여 년 전의 선언을 소환했다. “왜 지금 다시 페미니즘인가?”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신을 비웃을까 두려워하고, 여자들은 남자들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한다.” (마거릿 앳우드)

올해 5월, 서울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23세 여성이 칼에 찔려 죽었다. 많은 여성들이 본인의 일이 될 수도 있었던 페미사이드(Femicide·여성 살해) 앞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꼈지만, 세상은 이 사건을 젠더의 문제가 아닌 ‘조현병 환자의 우발적 살인’으로 명명했다. 그러자 인식의 간극 사이에서 웅크리고 있던 여성들은 목까지 차오른 혐오와 폭력의 체험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스스로의 언어로 본인 이야기를 집단적으로 꺼내놓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빠가, 남자가 지켜주는 사회는 필요 없습니다. 여자 혼자여도 안전한 사회가 필요합니다.” “밤늦게 돌아다니지 마라, 짧은 치마 입지 마라, 공중화장실 조심해라. 저는 뭘 더 조심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강남역 10번 출구를 뒤덮었던 포스트잇에 적힌 여성들의 분노와 무력감, 불안은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나무연필)에 엮였다. 깊은 한숨이 새겨진 짧은 문장들은 징검다리처럼 놓여 여성으로 살며 겪는 차별과 폭력의 실상으로 안내한다. 사건이 일어난 며칠 뒤 신촌 거리에서 열린 자유발언을 모은 〈거리에 선 페미니즘〉(궁리) 역시 비슷한 책이다. 발언자들은 여성이라면 한 번쯤 당해봤을 폭력의 경험들을 고백하며 다짐한다. “저는 더 이상 참지 않겠습니다.” 그저 에피소드에 머물 수도 있었던 여성들의 말이 꼼꼼히 채록되어 남은 것이 고맙다. 그들의 꺼내놓은 말들은, 저항의 결의가 모인 가장 강한 무기가 될 것이다.

딸에게, 여동생에게 ‘나 빼고 다 늑대니 밤늦게 다니지 마라’고 말하던 남성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왜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느냐는 불만을 토로했다. 여성 폭력사건 전문 변호사 조디 래피얼은 〈강간은 강간이다〉(글항아리)에서 가해자의 책임은 줄여주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범죄는 강간이나 가정폭력범 같은 오로지 젠더 관련 범죄뿐이라고 말한다. 올해 법원이 구속영장을 두 차례 기각한 아내 폭력 남편이 결국 아내를 살해한 사건이나, 최근 연이어 일어난 ‘#OO_내_성폭력’ 폭로 사건에서 보듯 많은 경우 여성을 향한 잔혹한 폭력은 한 명의 괴물이 아니라 이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강간 문화와 알고도 침묵하는 권력의 카르텔 속에서 발생한다. 일상에 만연한 강간 문화에 대한 지적이 ‘남성혐오’로 매도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든 페미니스트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의 문을 두드렸다. 그 문을 열어줄 책들 중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는 단연 돋보였다. “전투적이고 정치적이며, 인간으로서 완벽하고, 남자를 증오하고 유머가 없는 여성”이 되지 않아도 페미니스트일 수 있다는 이 책은 페미니스트라는 호칭 앞에서 멈칫하는 이들의 짐을 덜어준다. 록산 게이는 페미니즘을, 개개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근본주의 페미니즘’이나 ‘전문가 페미니스트’에서 구분해낸다. 그러고는 선뜻 페미니스트라 말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최고 버전의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좀 부족해도, 나쁜 페미니스트라도 괜찮다고 말하며 등을 두드려준다.

“페미니즘:[복수명사]”라는 이 책의 표현처럼 페미니즘의 어젠다는 다양하다. 그것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할 수 있는 어떤 ‘~주의’가 아니라 빈틈을 안고 계속 진화하는 진행형의 운동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페미니즘의 노력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는 것, 그것이 모두가 평등하게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게이는 선언한다. “어떤 페미니즘 이슈를 이야기하건 간에 나는 페미니스트이다. (…)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모순적인 사람이지만 확실한 건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 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시사IN 이명익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이후 영정 액자 모양의 거울을 든 시민들이 ‘거울 행동’이라는 행사를 열었다.

“우리는 먼 길을 왔지만, 앞으로 갈 길이 더 멀다”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종 등 다양한 이슈를 종횡하며 던지는 날카로운 지적들은 록산 게이 개인의 체험에서 끌어올려 울림이 깊다. 특히 여성혐오와 표현의 자유를 말하는 1부는 최근 광화문 촛불집회의 가사 논란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혐오 가사가 담겼지만 너무 근사한 노래 앞에서 혼란스러웠던 경험을 얘기하며 게이는 말한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그것을 가볍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혐오의 맥락에서 가볍게 넘기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할 테니 내버려두라는 말과 같다. “여성혐오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가장 끝에는 대중문화에서의 여성혐오가 자리 잡고 있고, 중간에는 여성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 행태가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이 나라의 입법자들이 있다. 입법자들은 이 모든 여성혐오가 활개 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TED 강연을 담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창비)도 페미니즘의 문턱을 낮춰주는 좋은 책이다. 아디치에는 처음 강단에 선 날, 진지하게 보이려고 좋아하는 치마 대신 남성적이고 흉한 정장을 입었던 일을 되새기며 여성성을 간직한 모습 그대로 존중받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는 페미니스트가 드높은 왕좌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오늘날 젠더에 문제가 있음에 동의하고 모두가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며 더 많은 연대의 가능성을 연다. 섹시하지만 헤퍼 보이면 안 되고, 현명하지만 설치면 안 된다는 식의 ‘진화된 성차별’의 굴레를 벗어던지라는 책 〈배드 걸 굿 걸〉(글항아리), 남성들이 문제 해결에 나설 때 결국 남성의 문제도 해결될 거라는 〈맨박스〉(한빛비즈)나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동양북스)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면서 ‘싸움의 기술’을 알려주는 매뉴얼북 출간도 이어졌다. 몰상식한 언어폭력에 당당히 대응하는 법을 알려주는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봄알람)에는 실전 매뉴얼이라는 독특한 형식이 따라붙었다. 이 호응은 우리 시대 영페미니스트들의 영리함을 증명하는 동시에, 막말 앞에서 곤경에 빠졌던 이들이 수많았음을 방증한다. 일상에 만연한 성폭력과 성차별을 가감 없이 담아낸 그래픽북 〈악어 프로젝트〉(푸른지식)나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메멘토)도 도움이 되는 책이다. ‘여자가 어쩌고…’의 족쇄에 시달리고 있다면 젠더 수행성을 뒤집는 파격적 실험으로 남성다움과 여성스러움이 그저 생식기의 종류에 따라 만들어진 신화임을 증명하는 〈여자다운 게 어딨어〉(창비)를 참조하는 것도 좋겠다.

ⓒ연합뉴스2016년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여성들은 목소 리를 내기 시작했다.

“더 가까이 오라. 그러면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임을.” (벨 훅스)

페미니즘은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끝없이 진동해왔고, 우리는 그 진동에 실려 조금씩 전진했다. ‘서프러제트’라 불리는 전투적 여성참정권 운동을 이끈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현실문화)나, 1960~1970년대 미국 래디컬 페미니즘의 기념비적 선언문 9편이 담긴 〈페미니즘 선언〉(현실문화), 그리고 페미니즘 특집으로 발간했으나 아이러니하게 반페미니즘 논란으로 난관을 맞기도 했던 잡지 〈릿터〉 2호에 실린 ‘김명순 평전’이나 시몬 드 보부아르부터 주디스 버틀러에 이르기까지 현대 페미니즘의 치열한 사유를 익힐 수 있는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사월의책)을 보면 오늘날 페미니즘의 성취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눈물 나는 사유와 정치적 투쟁 위에서 만들어졌는지 실감할 수 있다. 메갈리아 이후, 앞으로 전개될 우리의 페미니즘 또한 마냥 평화롭고 호혜롭지만은 않으리라는 것도.

남성과 여성, 젠더의 이슈를 주로 다루지만 사실 현대 페미니즘은 거의 모든 일상적·구조적 불평등 문제의 교집합이다. 당연히 복잡하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다양한 문화와 인종, 젠더의 공존을 과제로 안은 오늘날, 페미니즘은 사회정의와 인권 문제를 개선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성(Sex)과 젠더(Gender)의 구분을 넘어 모든 차이를 이해하려는 사유의 과정, 그것이 곧 페미니즘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각자가 자신의 모습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공존하는 것. 여성뿐만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모든 이들이 페미니즘을 배우고, 저항하고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이제까지 먼 길을 왔지만, 앞으로 갈 길이 더 멀기 때문이다.”

기자명 박정남 (교보문고 M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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