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경 대표에게 출판사는 오랜 꿈이었다.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했고, 7년 전부터는 아예 집도 출판단지 부근인 경기도 파주로 옮겼다. 외주 출판 노동자로 일하면서 출판사를 준비했다. 주변에서 말리는 목소리가 많았다. 왜 사양산업에 뛰어드느냐는 걱정이었다. “정말 그럴까? 근데 돈은 다른 일로 벌더라도, 책 만드는 일은 꼭 하고 싶었다. 종이매체의 운명이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할 수 있다면 마지막까지 하자. 종이로 책을 만드는 최후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이행성이 내놓은 첫 책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활동과 수요집회를 담은 〈25년간의 수요일〉이다. 5년 전 웅진주니어에서 나온 〈20년간의 수요일〉 개정 증보판이다. 책이 나오기 직전 굴욕적인 ‘위안부’ 합의가 발표됐다. 김 대표는 버스에서도 길에서도 불쑥불쑥 쏟아지는 눈물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세계 최장기 시위가 이뤄낸 성과에 대한 희망의 기록을, 국가가 짓밟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참담했다. 저희가 올해 내놓은 책이 사회 주요 이슈를 놓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게 어떻게 보면 또 사회가 퇴행한 결과이잖나.”
페미니즘에 관해 무슨 책부터 읽어볼까 생각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페미니즘을 계속 고민해왔던 사람들에게도 〈나쁜 페미니스트〉는 중요한 책으로 자리매김했다. 3월 출간된 〈나쁜 페미니스트〉는 초판 판매가 목표였다. 출간 보름 만에 책이 다 나갔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전자책까지 포함해 현재까지 10쇄를 찍었고, 2만8000부가 판매됐다. 사이행성의 내년 출간 예정 목록에도 록산 게이의 책이 들어 있다. 단편소설집 〈디피컬트 우먼〉과, 장편소설 〈언테임드 스테이트〉의 판권을 사두었다. 가능하다면 출간에 맞춰 저자의 방한도 추진하려 한다.
완전한 대중서로 만들기 위해 디자인에 집중
“사이행성의 책은 집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예쁘게 디자인하는 전반적인 감각이 눈에 띈다”라는 로고폴리스 김정희 대표의 말마따나 김윤경 대표는 ‘표지를 신경 쓰는 편집자’다.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의 경우, 책 내용을 어떻게 표지에 구현하느냐가 큰 숙제였다. 논문을 발전시킨 책이지만, 대중서로 만들고 싶었다. 저자가 고생한 만큼 ‘눈에 띄는’ 책을 만들고자 했다. 디자이너와의 집요한 회의가 반복된 결과물이 표지에 반영됐다. 부채 세대를 상징하는 반비례 도형의 표지는 독자로 하여금 책을 한 번 더 살펴보게 만들었다.
올해는 사이행성이 나아갈 방향과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해라고 생각해 한 권 한 권 신중을 기하느라 종수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 올해 사이행성이 내놓은 책 세 권 모두 여성 저자와 역자, 여성 디자이너가 힘을 합쳐서 낸 결과물이다. 남성 저자를 일부러 배제한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여성들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기회를 주고자 고려하는 측면도 있지만, 김 대표 스스로 더 매료되는 쪽이 여성들이 내놓은 창작물이기도 하다. 내년 여성의 날에 맞춰 출간할 예정인 〈젠더 메디신〉(가제)은 여성의 몸에 관한 외서다. 의학이 남성의 몸을 전제로 한 학문임을 폭로하는 내용으로 의학과 페미니즘이 결합된 책이다. 이 책을 포함해 내년에는 8종의 책을 독자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책임편집자가 두 명인 작은 출판사이지만 내년에는 임프린트 ‘어떤날’도 따로 출범시킨다. 인문·사회과학 책은 사이행성에서, 실용과 디자인, 예술 쪽 책은 어떤날을 통해 출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