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세 권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사이행성이 내놓은 책 세 권 중 두 권이 출판인들이 꼽은 ‘올해의 책’에 이름을 올렸다(60~63쪽 기사 참조). 국내서에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 번역서에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꼽혔다.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는 추천위원들이 꼽은 올해의 책이기도 하다(44~46쪽 기사 참조). 내년이 기대되는 ‘루키 출판사’를 선정해달라는 질문에 출판인들이 사이행성을 제일 많이 꼽은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올해 딱 세 권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이지만 내는 책마다 지금, 여기,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책을 선보였다. 신중한 행보가 앞으로를 더 기대하게 만드는 출판사다”라는 평이다.

김윤경 대표에게 출판사는 오랜 꿈이었다.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했고, 7년 전부터는 아예 집도 출판단지 부근인 경기도 파주로 옮겼다. 외주 출판 노동자로 일하면서 출판사를 준비했다. 주변에서 말리는 목소리가 많았다. 왜 사양산업에 뛰어드느냐는 걱정이었다. “정말 그럴까? 근데 돈은 다른 일로 벌더라도, 책 만드는 일은 꼭 하고 싶었다. 종이매체의 운명이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할 수 있다면 마지막까지 하자. 종이로 책을 만드는 최후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이행성이 내놓은 첫 책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활동과 수요집회를 담은 〈25년간의 수요일〉이다. 5년 전 웅진주니어에서 나온 〈20년간의 수요일〉 개정 증보판이다. 책이 나오기 직전 굴욕적인 ‘위안부’ 합의가 발표됐다. 김 대표는 버스에서도 길에서도 불쑥불쑥 쏟아지는 눈물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세계 최장기 시위가 이뤄낸 성과에 대한 희망의 기록을, 국가가 짓밟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참담했다. 저희가 올해 내놓은 책이 사회 주요 이슈를 놓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게 어떻게 보면 또 사회가 퇴행한 결과이잖나.”

ⓒ사이행성 제공사이행성의 김윤경 대표(위)는 “종이로 책을 만드는 최후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겠다”라고 말했다.
퇴행의 흐름 속에서 놓치지 않으려 했던 건 ‘임파워링(권능 부여하기)’이다. 출판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쁜 페미니스트〉는 그런 기조 속에서 기획됐다. 여성학은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한 학문인데, 이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가 김 대표에게는 일종의 숙제였다. 전문 지식이 없어도 접근이 가능해서 저변을 확대할 수 있는, 허들이 높지 않은 책을 만들고 싶었다. 그때 검토하게 된 외서가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였고, ‘이거다’ 싶었다. “록산 게이의 언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겠구나, 그래서 더 많은 연대를 가능하게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덟아홉 번씩 원고를 읽고 또 읽으면서 보도자료를 썼다.

페미니즘에 관해 무슨 책부터 읽어볼까 생각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페미니즘을 계속 고민해왔던 사람들에게도 〈나쁜 페미니스트〉는 중요한 책으로 자리매김했다. 3월 출간된 〈나쁜 페미니스트〉는 초판 판매가 목표였다. 출간 보름 만에 책이 다 나갔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전자책까지 포함해 현재까지 10쇄를 찍었고, 2만8000부가 판매됐다. 사이행성의 내년 출간 예정 목록에도 록산 게이의 책이 들어 있다. 단편소설집 〈디피컬트 우먼〉과, 장편소설 〈언테임드 스테이트〉의 판권을 사두었다. 가능하다면 출간에 맞춰 저자의 방한도 추진하려 한다.

완전한 대중서로 만들기 위해 디자인에 집중

“사이행성의 책은 집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예쁘게 디자인하는 전반적인 감각이 눈에 띈다”라는 로고폴리스 김정희 대표의 말마따나 김윤경 대표는 ‘표지를 신경 쓰는 편집자’다.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의 경우, 책 내용을 어떻게 표지에 구현하느냐가 큰 숙제였다. 논문을 발전시킨 책이지만, 대중서로 만들고 싶었다. 저자가 고생한 만큼 ‘눈에 띄는’ 책을 만들고자 했다. 디자이너와의 집요한 회의가 반복된 결과물이 표지에 반영됐다. 부채 세대를 상징하는 반비례 도형의 표지는 독자로 하여금 책을 한 번 더 살펴보게 만들었다.

올해는 사이행성이 나아갈 방향과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해라고 생각해 한 권 한 권 신중을 기하느라 종수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 올해 사이행성이 내놓은 책 세 권 모두 여성 저자와 역자, 여성 디자이너가 힘을 합쳐서 낸 결과물이다. 남성 저자를 일부러 배제한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여성들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기회를 주고자 고려하는 측면도 있지만, 김 대표 스스로 더 매료되는 쪽이 여성들이 내놓은 창작물이기도 하다. 내년 여성의 날에 맞춰 출간할 예정인 〈젠더 메디신〉(가제)은 여성의 몸에 관한 외서다. 의학이 남성의 몸을 전제로 한 학문임을 폭로하는 내용으로 의학과 페미니즘이 결합된 책이다. 이 책을 포함해 내년에는 8종의 책을 독자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책임편집자가 두 명인 작은 출판사이지만 내년에는 임프린트 ‘어떤날’도 따로 출범시킨다. 인문·사회과학 책은 사이행성에서, 실용과 디자인, 예술 쪽 책은 어떤날을 통해 출간한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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