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 가면 칼과 저울이 있다
  • 문정우 기자
  • 호수 484
  • 승인 2016.12.30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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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 촛불 속에서, 박근혜 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 중계를 들으면서 계속 법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에게 법은 무엇일까. 1215년 영국에서 대헌장이 공포된 때만큼이나 지금 우리는 법치에서 중대한 고비를 맞았다고 생각했다. 대헌장은 라틴어로 돼 있고 뜻도 모호해 실제로는 해독하기 어렵다는데 제39조만은 언제 읽어도 힘 있다.

“자유민은 그와 동등한 자의 적법한 판정에 의하거나 국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 구금되거나, 재산이나 법적 보호가 박탈되거나, 추방되거나 다른 방법으로 침해당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를 공격하거나 다른 사람을 보내 공격하지 않는다.”

욕심은 많았지만 멍청했던 존 왕을 핍박해 이 대헌장에 서명하게 만든 영국의 귀족이 특별히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이타심에 불탔던 것은 아니다. 왕권이 쇠퇴한 틈을 타 자신들의 재산과 자유를 확실하게 지킬 기회를 엿봤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헌장은 영국의 역사는 물론 나중에는 세상을 바꾸는 큰일을 해냈다. 대헌장은 모든 자유민이 동등하다고 전제해 시민 사이에 공동체 의식이 싹트게 만들었다. 영국이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하면서 유혈 충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공동체 의식 덕분이었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고려시대 <삼국유사>가 쓰일 어림에 작성된 문안이란 게 믿기질 않는다. 대헌장은 프랑스와 미국으로 건너가 법이 곧 왕이 되는 법치주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한성원 그림
박근혜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을 때 정치인들은 정확하게 시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탄핵에 필요한 정족수를 채우기 힘들고, 가결된다 해도 몇 달이나 걸려 헌법재판소라는 만만찮은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야당도 적법한 절차를 밟는 걸 망설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담화가 나올 때까지도 여야 모두 혼란스러워했다. 촛불 민심도 하나였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도도한 큰 흐름은 일관되게 법대로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시민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는 헌법이 있었다. 여야는 모두 시민의 명령에 복종했고 압도적인 표 차로 탄핵안을 가결하기에 이르렀다.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그동안 우리의 삶은 법과 동떨어져 있었다. 우리 존재의 근간인 헌법 자체를 유린한 범죄마저 제대로 단죄한 적이 없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그의 긴 임기 동안 벌어졌던 헌법 유린, 부정선거, 정적 암살, 부패, 독직 혐의가 모두 덮이고 말았다. 이런 추악한 스캔들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적법한 조처가 취해졌다면 우리는 역사의 단추를 새로 끼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승만 시대의 과오는 또 다른 헌정 유린 세력인 박정희 군부가 들어서면서 시중의 술안줏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뒤 18년간 자행된 박정희의 헌법 파괴와 인권 탄압, 그리고 이루 열거하기도 힘든 권력형 범죄 사실 역시 불의한 세력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가려지고 말았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내란 혐의 역시 김영삼 정부 당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정치 검찰의 논리에 말려 법정에 가지도 못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헌정을 짓밟고 그것을 외면하는 긴 여정이었다.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피해자나 그 가족, 그리고 시민단체는 종종 이런 종류의 범죄에 대한 대한민국 법원의 양형이 너무나 가볍다며 들끓곤 하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헌법학자 김욱 교수(서남대)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문화가 폭력에 관대한 탓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 거기다가 유아원 폭력까지 좀처럼 근절되지를 않는다. 김 교수의 가설에 따르면 우리는 수십 년간 군사정권의 폭력과 파시즘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아왔다. 부당한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 저항했던 세월도 길다. 폭력 자체에 대한 무감각이 자라날 수 있다. 그것이 들어서는 정권마다 범죄를 근절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도 어째서 실제로 사법부의 처벌은 솜방망이처럼 보이는지 설명한다.

이를테면 법질서 확립은 평등하게 해야 한다. 노동자의 불법 시위만 처벌하고 자본가의 부당노동행위는 눈감아준다면, 절도는 처벌하면서 재벌의 편법 증여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면, 교사·교수의 위법행위에는 엄격하면서 재단의 비리에는 눈감는다면, 블루칼라는 가혹하게 처벌하면서 화이트칼라는 놔준다면, 촛불 시위자와 인터넷 댓글러들은 엄벌하면서 인사 청문회에서 태연하게 위증하는 대법관은 법 위에서 노닐도록 방치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결국 모든 범죄행위에 대한 형량 디플레이션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시민의 법의식은 훌쩍 자랐는데 뒤를 이어 들어선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시민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박연차 게이트 수사로 노무현 대통령을 자살로 몰아간 검찰은 도덕적 해이의 극치를 보여줬다. 검찰은 수사권·수사지휘권·기소권·기소재량권을 독점한 폐해를 스스로 증명하기에 바빴다. 미네르바, 촛불집회,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 정연주 KBS 사장과 <PD수첩> 수사에서 정치 검찰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급기야 현직 검사장과 부장검사가 부패에 연루돼 구속되는 초유의 일까지 벌어졌다. 비교적 청정지역으로 보였던 법원에서도 악취가 진동하는 중이다. 검사와 판사가 권력과 자본의 시녀라는 전통적인 역할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형사사건 피의자가 되어보는 경험을 쌓아간다고나 할까. 법을 다루는 자들의 범법에 법원의 팔은 번번이 안으로 굽는다. 4차 청문회에서는 청와대가 대법원장을 사찰했다는 의혹까지 터졌다. 사법부는 거의 벌거벗은 채 촛불 민심과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었다.

청문회에 등장한 재벌 총수들은 대한민국의 법이 얼마나 무력한지 말해주는 증인들이다. 축구대표팀 감독처럼 미국이나 영국 혹은 독일에서 검사와 판사를 영입했다면 장담하건대 청문회에 참석한 재벌 총수들은 모두 감옥에 가 있을 것이다. 대를 이은 그들의 형량을 합치면 족히 천년은 넘지 않을까. 웬만한 범죄는 사법부가 외면해버리는 가운데서도 2004년 이후 형사사건에 연루돼 유죄판결을 받은 재벌 총수 일가는 20개 기업집단 30명에 달한다. 그중에는 중형을 받아 마땅한 누범도 있다. 그런데도 실형을 산 이들은 거의 없다. 맞춤복을 입은 듯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총수 가운데는 최태원 SK 회장이 복역 중이었으나 박근혜 정부의 특별사면을 받아 청문회에 참석해 눈만 끔뻑거리고 있지 않았던가. 도대체 그들이 아무런 직함도 없는 최순실 모녀에게 갖다 바친 그 많은 돈이 뇌물이 아니라면 무엇을 뇌물이라고 불러야 할까.

여야 의원들은 재벌 총수들을 호되게 몰아붙이거나 그들에게 노골적으로 아첨했지만 감옥에 가야 마땅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들은 국민에게 사과하라거나, 전경련이나 그룹 컨트롤타워를 해체하라고 다그쳤고 총수들은 쩔쩔매는 듯 보였지만 결론이 뻔한 3류 드라마처럼 비쳤다. 의원들은 재벌 총수들에게 면죄부를 주느라 바쁘고, 재벌 총수들은 당연하다는 듯 받아 챙겼다. 재벌에 대한 의원들의 태도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광장의 민심은 싸늘하기만 하다. ‘재벌도 공범’이란 구호는 ‘이게 나라냐’만큼 흔하다.

젊은 법학도라면 한 번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읽어보았을 독일의 저명한 법철학자 루돌프 폰 예링이 쓴 명저 <권리를 위한 투쟁>에 따르면 광화문의 촛불 민심은 지금 각성한 상태이다. 법을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은 한 손에는 법을 가늠하는 저울을 들고, 한 손에는 법을 관철하기 위한 칼을 들고 있다. 예링에 따르면 저울이 없는 칼은 노골적인 폭력일 따름이다. 반면 칼이 없는 저울은 무기력 그 자체이다. 그는 법이란 신이 부여한 이성의 안내로 들판의 풀처럼 자연스럽게 획득한 것이라는 전통 법철학의 견해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법은 투쟁을 수반할 때만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고통 없이 누리게 된 법은 언젠가 황새가 물어가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책임은 불의한 자들이 아니라 비겁한 자들이 져야 할 것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의와 무법이 오만하게 판을 친다면 그것은 법을 방어할 사명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까지 말했다. 책임은 불의한 자들이 아니라 싸움을 피한 비겁한 자들이 져야 한다. ‘불법을 저지르지 마라’와 ‘불법에 항거하라’ 중 우선순위를 매긴다면 주저 없이 후자를 택하겠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영국인이 법의 보호 아래 자유를 만끽하게 된 것은 오스트리아인보다 10배는 더 작은 법 위반에 민감했기 때문이라며 자기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가 윤리적 분노가 폭발하는 모습을 묘사한 대목에서는 세월호가 침몰한 팽목항 현장, 그리고 박근혜 게이트에 항의하는 광화문광장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윤리적 폭발력은 모든 것을 발아래 굴복시킬 정도로 숭고하고 장엄하다. 순수한 분노가 가져다주는 자극은 용서와 품격을 갖추게 된다. 이는 그 주체와 세계의 도덕적 공기정화 장치라고 부를 만하다.’ 그는 마치 광화문광장 한복판에서 분노가 화려하게 폭발하면서도, 차분하고 관대하게 승화돼가는 장관을 즐기고 있는 듯하다.

법치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중요한 척도이기는 하지만 만능키는 아니다. 법은 본래 기득권 친화적이다. 근대법은 근본적으로 자본가의 이익에 봉사하려고 만들었다는 점을 언제나 상기할 필요가 있다. 법치가 곧 경제 정의를 뜻하지는 않는다. 재벌의 불법을 응징하려면 긴 싸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역시 기본은 법치이다. 법이 가진 한계가 분명하지만 법의 지배를 받아들인 나라에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나라에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인정해야만 한다고 했던 영국의 전 대법관 톰 빙엄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건강한 법 감정을 회복하는 게 어떤 대량살상무기보다 더 확실하게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는 예링의 말도 곱씹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바른 사법체제에 대한 갈망이 작열하는 광화문광장에 있으면 북핵 따위는 사소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존 왕 못지않게 공동체 의식에 불을 지르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


참고한 활자:<권리를 위한 투쟁/법 감정의 형성에 관하여>(새물결), <법의 지배>(이음), <법을 보는 법>(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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