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이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다. 12월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에 찬성한 의원은 총 234명. 야권 및 무소속 의원이 전원 가결했다고 가정하면, 새누리당에서만 62명이 탄핵 열차에 합승한 셈이다. 새누리당 소속 의원 128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탄핵소추안 국회 통과는 캐스팅보트를 쥔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의 동참이 결정적이었다. 당초 12월2일 ‘대통령 4월 퇴진’에 동의했던 비박계는 이틀 만에 방침을 바꿨다. 사상 최대 인파(주최 측 추산 232만명)가 모인 12월3일 촛불집회 영향이 컸다. 12월4일 비박계 대책기구인 비상시국회의에서 탄핵 찬성 방침이 공식 발표되자, 당내 중립지대에 놓여 있던 의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박계가 자신했던 30~40표보다 더 많은 표가 움직이면서 여당 내 권력지형 개편 신호탄이 올랐다.

탄핵안 가결로 반전 계기를 마련했지만, 비박계 역시 ‘박근혜 게이트’의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않다. 비박계로 분류되는 의원 중 상당수가 박근혜 정부 탄생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들이다. 물론 지금은 비박계이지만 원조 친박이나 다름없었던 이들은 짊어져야 할 연대보증 책임이 더 크다.
 

ⓒ연합뉴스2005년 10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유세 중인 유승민 후보(맨 오른쪽)와 유권자를 만나고 있다.


‘친박’이라는 계파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는 2005년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를 맡으면서다. 당시 박근혜 대표 곁에서 핵심 당직을 맡은 두 인물이 오늘날 비박계의 중심에 선 김무성 전 대표와 유승민 전 원내대표다.

2005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김무성 의원에게 사무총장을 맡기며 인연을 맺었다. 이 인연은 2007년 대선 경선까지 이어졌다. 김 의원은 경선 캠프 조직총괄본부장을 맡아 친이계와 정면충돌했다. 경선 탈락의 대가는 컸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 직후 친이계는 2008년 18대 총선에서 친박을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김 의원도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탈당해 부산 남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했다. 배지를 달고 다시 당에 복귀한다. 18대 국회에서 김무성 의원의 존재감은 컸다. ‘친박연대’ 공천헌금 파동으로 서청원 전 대표가 징역형을 선고받으면서 그가 친박계의 좌장 노릇을 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9년 5월, 한나라당 원내대표 선거를 앞두고 둘 사이 갈등이 시작되었다. 친이계가 당내 친이-친박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김무성 의원을 원내대표로 추대하려 했는데, 박근혜의 반대로 무산된 탓이다. 두 사람의 갈등 상황은 화해 여부가 기사화될 정도로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한번 금이 간 관계는 2009년 세종시 수정안을 둘러싸고 폭발했다. 박근혜는 당시 원안을 고수한 반면, 김무성은 수정안에 찬성하면서 두 사람은 사실상 결별했다.

결별의 대가는 컸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김무성 의원은 친박계가 주도한 공천에서 물갈이 대상으로 지목받았다. 수세에 몰린 끝에 김 의원은 ‘백의종군’을 선언하며, 잠시 정치권을 떠나야 했다. 잠행은 길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대선을 앞둔 박근혜 당시 후보가 위태로운 대선 구도를 다잡기 위해 김무성을 다시 불러들였다.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은 김무성은 결국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박근혜 정부의 실패에 김무성의 책임이 가볍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합뉴스2012년 3월 박근혜 새누리당 선대위원장이 새누리당 부산시당 선거대책위원회 발대식에서 김무성 의원(맨 왼쪽)과 악수를 하고 있다.

 


또 다른 핵심 인사는 대표적인 ‘탈박(친박이었다가 박근혜 대통령과 멀어진 인물)’ 유승민 의원이다. 유 의원 역시 2005년 당 대표 비서실장을 맡으며 박근혜 대통령과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당시 사무총장 김무성-비서실장 유승민-대변인 전여옥 라인업은 사실상 ‘친박의 시작’과 같았다. 유 의원은 이후로도 2007년 대선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 정책메시지총괄단장을 맡으며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친박 핵심 참모였던 만큼, 유승민 의원도 사실상 최순실 사태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유 의원은 최순실의 존재를 몰랐다고 주장하지만, 대선 경선을 준비하는 핵심 참모가 후보의 주변 상황을 몰랐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유승민과 김무성은 원조 친박이었다

최근 과거 발언이 재조명되는 것도 유 의원으로서는 부담이다.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 검증 청문회가 있었던 2007년 7월19일, 당시 박근혜 경선 캠프 유승민 단장은 최태민과 관련된 각종 의혹에 대해 “말도 안 된다. 이명박 후보와는 다르다. 최태민씨가 박 대표의 큰형이나 처남도 아니고, 14년 전(실제로는 13년)에 돌아가셨는데(왜 이런 얘기를 꺼내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유 의원의 발언 당시, 현장에는 또 다른 익숙한 얼굴이 박근혜 경선 캠프 실무를 맡고 있었다. 캠프 대변인을 맡았던 이혜훈 의원이다. 이 의원 역시 원조 친박이자, 대표적인 ‘탈박’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혜훈 당시 대변인은 2007년 7월19일 최태민 관련 의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들추고 제기할 의혹이 없었으면, 돌아가신 지 오래된, 대표와 직접 관련도 없는 사람에 대해 (의혹을 제기) 했겠나?” 대통령 예비후보의 메시지단장과 대변인 모두 최순실의 존재, 최태민과의 연계성을 부인했다. 설령 정말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관계를 몰랐다 하더라도 자체 검증이 부족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대목이다.

이번 탄핵 정국에서 이름값을 높인 비박계 의원들도 박근혜 정부의 탄생에 일조한 경력이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국조특위’ 위원과 비상시국회의의 대변인 격으로 존재감을 보인 황영철 의원 역시 마찬가지다. 황 의원은 18대 국회 초선 쇄신파 모임인 ‘민본21’ 멤버다. 2011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디도스(DDoS) 공격 파문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처했을 때, 홍준표 당시 대표의 퇴진을 요구하며 박근혜 등판론에 힘을 실은 이들이 ‘민본21’이다. 이번 탄핵 국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김영우·김성태·김세연 의원 모두 ‘민본21’ 출신이다. 당시 당내 초선 모임으로 소수파에 불과한 이들이 주도해, 박근혜 만들기에 나선 것이다.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재창당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들이다.

과거 박근혜 대통령을 만드는 데 일조한 이들은 결국 유권자의 압력에 의해 ‘탄핵’이라는 길을 선택했다. 당장 탄핵소추안 가결로 비박계가 그나마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도 사실이다. 원내 소수파에 불과한 비박계가 20대 국회에서 거둔 첫 승리다. 234표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서 여권발 정계 개편 가능성도 높아졌다. 비박계가 보수 정당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결국 판이 흔들려야 한다. 친박 리더십이 무너진 현재 기존 새누리당이 그대로 유지되리라 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최근 대두되고 있는 ‘반기문 신당론’도 탄핵 이후 본격화할 정계 개편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다.

 

 

 

 

ⓒ연합뉴스2010년 10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대표최고위원 및 최고위원 경선에 후보로 나선 이혜훈 후보(왼쪽)를 격려하고 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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