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30일, 검찰은 ‘박근혜 게이트’와 관련해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피의자로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날 기자들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김 전 실장의 집 앞에 진을 쳤다. 철조망을 얹은 담장은 옆집보다 2배 정도 높았다. 두꺼운 커튼이 모든 창문에 드리워져 있었다.

정오에 문이 잠시 열렸다. 퀵서비스로 서류 봉투가 배달됐다. 양복을 입은 40대 남성이 물건을 받아갔다.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연달아 터뜨리며 “김 실장님 안에 계십니까?”라고 질문했다. 대답 없이, 철문은 다시 닫혔다.

퀵서비스를 보낸 한국에너지재단 관계자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지난 9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한국에너지재단에서 이사장(2009~2012년)으로 재직할 당시에 기부금 119억원이 사라졌다는 보도가 났다. 국정조사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면 골치 아프니 설명 자료를 보내달라고 하셨다. 빈틈없이 답변하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 하지만 워낙 (김기춘 전 실장이) 용의주도하고 치밀해 책잡히도록 한 일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김기춘 전 실장은 여러 의혹에 이름을 올렸지만, 형사처분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2015년 ‘성완종 리스트’에도 그는 이름을 올렸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지난해 4월 목숨을 끊으면서 ‘김기춘 10만 달러, 허태열 7억, 홍문종 2억, 부산시장 2억, 유정복 3억, 홍준표 1억, 이완구, 이병기’라고 적힌 메모를 남겼다. 그는 자살 직전 〈경향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2006년 9월경 김기춘씨가 박근혜 대통령을 모시고 벨기에와 독일에 갈 때 10만 달러를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 전달했다”라고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하지만 검찰은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한 차례 서면조사한 뒤 무혐의 처분했다.

김기춘 전 실장은 박근혜 게이트의 전조라 할 수 있는 ‘정윤회 문건 사건’에도 깊이 관여했다. 2014년 11월 〈세계일보〉는 ‘정윤회 문건’을 입수해 보도했다. 최순실씨 남편이었던 정윤회씨와 이른바 십상시의 국정 개입 의혹을 제기했다. 이때도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의 수사 가이드라인에 따라 문건 내용의 실체 규명이 아닌 문건 유출에만 집중해 수사했다. 검찰은 수사 1개월 만에 ‘문건 내용은 허위’라고 결론지었다. 검찰은 당시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과 박관천 전 행정관 등을 문건 유출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기소되었던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재판에서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지시로 문건을 만들어 보고했다”라고 말했다.

검찰이 김 전 실장을 기소한 적은 있다. 바로 ‘초원복국집’ 사건 때다. 1992년 14대 대선 일주일 전, 당시 법무부 장관에서 막 내려온 김기춘씨는 김영환 부산시장, 박일용 부산지방경찰청장 등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초원복국’이라는 음식점에 불러 모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다리 빠져 죽자. (중략)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라고 말했다. 이 녹음 파일이 공개되어, 그는 당시 대통령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됐다. 그러나 그는 법률 전문가답게 검찰이 기소한 대통령선거법 제36조 1항 “등록한 선거운동원이 아닌 자는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라는 규정이 참정권을 지나치게 제한해 위헌 소지가 있다며 위헌심판 제청 신청을 했다. 1994년 7월29일 헌법재판소는 해당 조항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위헌 결정으로 공소는 취하되었고 형사처벌을 피했다. 그해 12월19일 민주자유당 국책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간첩은 조작하고, 지역감정은 조장하고

김기춘 전 실장과 박근혜 대통령의 인연은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전 실장은 1963년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이런 인연으로 정수장학생들의 모임인 ‘상청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72년 유신헌법 제정 과정에도 관여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조언했던 헌법학자 한태연은 2002년 한국헌법학회가 주최한 한 강연에서 “당시 법무부 법제과장이던 김기춘 의원이 파리에 가서 1년 있었고, 드골 헌법의 자료를 수집했던 모양이다. 박 대통령이 프랑스 헌법 제16조의 비상대권(비상조치)에 매력을 느껴서 이를 골자로 헌법 초안을 내놨다”라고 말했다.

1974년 8월15일, ‘육영수 피격 사건’ 때 서른다섯 살이던 김기춘 검사는 저격범이었던 문세광 수사에 합류했다. 그는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냈다고 말했다. 이후 김기춘 검사는 승승장구한다. 1975년 중앙정보부(중정) 대공수사국장으로 임명됐고, 1979년에는 청와대 특별보좌관실 보좌관이 되었다. 중정 시절에는 ‘재일동포 유학생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는 등 악명 높은 공안 사건을 담당했다. 재일동포 100여 명이 간첩 혐의로 구속되었고 고문 등으로 허위 자백을 했다. 간첩으로 몰려 13년간 옥살이를 했던 이철씨를 비롯해 23명이 재심 끝에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김기춘 전 실장은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1988년,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91년 5월에는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당시 신한국당 소속으로 당선했다. 이후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4년 3월12일, 국회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가결했다. 김기춘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헌법재판소에 직접 탄핵안을 제출한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그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선 후보 경선 캠프에 합류했다. 이후 그는 정치권에서는 ‘7인회’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원로 자문그룹의 일원으로 지목되었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지난 11월27일 차은택씨의 변호인은 “최순실씨 소개로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을 만났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김 전 실장은 “박근혜 대통령 지시로 차은택 감독을 만났을 뿐 최순실씨를 모른다”라고 해명했다. 특검 수사를 통해 이 해명의 진위가 가려질 전망이다. 박영수 특별검사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특검 수사 대상이냐”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수사 대상으로 알고 있다. 일반인과 똑같이 소환해서 조사하고 또 다른 증거자료를 수집해서 사실관계를 특정한 다음에 범죄가 된다 하면 법대로 하겠다”라고 답했다. 그가 이번에도 형사처벌을 피할 수 있을까?

기자명 신한슬 기자 다른기사 보기 hs51@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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