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29일 토요일 오후, 스웨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예테보리 중심가에 있는 뢰스카 디자인 미술관에는 케이팝 댄스음악이 크게 울려 퍼졌다. 평소라면 관람객이 많지 않은 미술관인데 관람객들이 삼삼오오 들어오더니 순식간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공연을 펼친 청소년들은 외모 때문에 한국 부모를 둔 청소년으로 비쳤다. 하지만 모두 부모가 동남아시아 출신이었다. 이들은 더듬더듬 한국어로 인사를 했고 먼 나라 한국을 동경했다. 또래끼리 공연하는 데 익숙한 이 학생들은 처음에는 다양한 관객층에 다소 긴장했다. 이내 케이팝 댄스 퍼포먼스, 뮤직비디오 상영, 댄스 워크숍, 퀴즈 등 준비된 공연을 펼쳐 보였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스웨덴 일간지 〈예테보리 포스텐〉 문화면 3면에 걸쳐 케이팝과 공연을 펼친 청소년들에 관한 기사를 소개할 정도였다. 필자는 이 행사를 6개월 전부터 공동 기획하면서 스웨덴 고등학교 학생들의 일과와 생활을 가까이 관찰할 수 있었다.

공연을 한 댄스 그룹 멤버 다섯 명 가운데 넷은 예테보리 린드홀멘에 있는 요리·서빙 전문 직업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나머지 한 명은 신입 멤버로 예술고등학교에 다닌다. 스웨덴에서 고등학교는 ‘임나지움’이라 불린다. 등록금이 없는 무상교육이다. 스웨덴에서 고등학교는 대학 입학 준비 과정이지만 직업학교도 있다. 한국과 똑같이 보통 3년제이지만 여러 이유로 3년 이상 다니는 학생이 많다. 대학 입학 준비 과정을 위한 고등학교들은 자연과학·기술·인문과학·예술·생명공학·사회과학·기업가 프로그램 등 특화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과정을 수료하면 대학 진학에 필요한 기초 과목들에 대한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직업고등학교는 대학 진학을 원할 때 필요한 기초 과목을 따로 수강할 수 있다.
 

ⓒ예테보리 포스텐 홈페이지예테보리 시 뢰스카 미술관에서 케이팝 댄스 퍼포먼스를 펼치는 스웨덴 고등학생들.

요리·서빙 전문 직업고등학교에 다니는 그룹 멤버 대부분은 주말에 식당이나 햄버거 가게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 중 한 명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소녀 가장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사실 대학 진학이라는 꿈은 아직 없다. 이들이 다니는 직업고등학교 교과과정은 요리 실습, 이론, 서빙 실습, 인턴 프로그램 등으로 이루어져 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을 한다. 전문 요리사가 되거나 고급 식당에서 서빙을 한다. 직업학교에 다니더라도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대학 교육이 필요한 적절한 때를 스스로 찾으면 그때 입학을 결정해도 된다. 이렇듯 꽤 자율적으로 시간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방과 후 여가 활동이 이들에게는 무척 중요한다.

이 청소년들은 케이팝뿐 아니라 먹을거리 문화도 아시아 음식 위주로 공유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트램(노면전차)을 타고 30~40분 걸리는 프릴룬다 유스센터로 가곤 한다. ‘1200㎡’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청소년 문화센터는 예테보리 시에서 직접 운영하는 산하기관이다. 예테보리에 사는 청소년이면 누구나 이 센터 회원이 될 수 있고, 청소년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문화 활동을 선택해 즐길 수 있다. 활동하는 케이팝 그룹만 해도 11개가 넘는다. 몇몇 그룹이 케이팝 음악을 소개하다가 다른 그룹이 참여하고 소문이 나면서 이 문화센터는 스웨덴에서 케이팝 행사를 가장 많이 기획하고 참여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기자재도 따로 있어서 음악을 작곡·편곡할 수도 있고, 댄스 연습실·공연실·회의실·카페 등이 구비되어 있다. 학생들이 이용하지 않는 시간대에는 동네 주민들이 체조를 하거나 각종 모임을 한다.

이 청소년 문화센터장인 크리스티안 멜로 씨는 팝 뮤직 및  매니지먼트 회사 프로듀서 출신이자 콘서트 기획 전문가이다. 그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공연 기획을 하고 그 과정에서 기업가 정신을 스스로 배울 수 있다”라고 말했다. 예테보리 시가 운영 비용을 부담하지만, 유럽연합 청소년 프로젝트에서 활동비를 지원받기도 한다. 예를 들면 유럽연합 국가 간 청소년 교류 사업을 통해 청소년들은 다른 나라 청소년들을 여러 경로로 만나서 문화 체험을 할 기회를 제공받기도 한다.
 

1998년 예테보리 시 청소년 디스코텍 화재로 63명이 숨졌다.

청소년들이 기획하면 시에서 재정 지원

예테보리 시가 청소년 그룹에 대한 재정을 상당 부분 지원하고 있는데 이런 지원을 가능하게 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있었다. 1998년 10월30일 밤, 예테보리 시민들뿐만 아니라 전 스웨덴을 울린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예테보리 강을 경계로 북부에 있는 섬인 히싱엔에 위치한 청소년 디스코텍에서 무려 63명의 꽃다운 청소년이 화마에 목숨을 잃었고 200명이 넘는 청소년이 끔찍한 화상을 입었다. 청소년 4명이 방화범으로 구속되었는데 이 중 한 명이 디스코텍 입구에서 입장을 거부당했다는 이유로 홧김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은 앙심을 품은 소년들이 저지른 범죄이기도 하지만, 건물의 비상구가 부실하고 정문이나 창문 등이 법규에 맞지 않게 설계되는 등으로 인해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인재였다.

이 사건 이후에 예테보리 시는 청소년 문화센터를 시내 여러 곳에 만들고 청소년 문화센터에 예방 차원의 프로그램 지원을 강화했다. 청소년들이 불법 또는 시설 미비의 파티장 출입이나 마약 등의 탈선에 빠지지 않고 그들만의 취미·생활 공간에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도록 적극 배려했다. 16~20세 청소년들이 스스로 참여해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할지 결정하게 했다. 멜로 씨와 같은 청소년 담당 예술 강사들이 센터에 채용되어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멘토로 활동하며, 이벤트를 기획하고 진행할 때 물밑에서 지원을 해주기도 한다. 멜로 씨는 “청소년들이 기획 아이디어가 있으면 제출하게 하고 그 계획 등을 검토하여 재정 지원 여부를 결정한다. 절대로 어른들의 눈높이에 맞춘 프로젝트를 만들려고 개입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지난여름 케이팝에 관심이 많은 몇몇 청소년이 한국의 아이돌 그룹을 초청하고 싶어서 아이디어를 냈다. 하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그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준비하다 실패를 하더라도 그것 역시 배움의 과정으로 본다. 프로젝트마다 사후 평가를 해 다음 프로젝트에서는 부족했던 부분을 좀 더 잘해낼 수 있도록 지원한다”라고 덧붙였다. 지난 6개월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린 필자의 결론도 비슷하다. 청소년들은 시간과 공간이 허락된다면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스스로 만들며 성장한다. 그곳이 한국이든 스웨덴이든.

기자명 스웨덴·고민정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