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로 쏟아진 촛불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새누리당도 공범이다.” 구호로 그치지 않았다. 민심은 여당에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이 11월18일 발표한 ‘주요 정당 지지도’에 따르면, 11월 셋째 주 새누리당 전국 지지율은 15%에 불과했다. 9월 둘째 주(34%)부터 줄곧 하락세다. 총선을 치른 지난 4월 둘째 주(37%)와 비교하면 반절도 안 된다. 수도권은 더 참혹한 수준이다. 서울 11%, 인천·경기 13%로 국민의당보다 지지율이 낮다.

‘난파선 선장’은 ‘책임론’을 회피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당 안팎에서 요구하는 퇴진론에 강하게 반발했다. 11월17일 이 대표는 “나는 (내년 1월21일 전당대회) 날짜까지 박아 로드맵을 제시했다. 지금부터 당의 모든 혼란에 대한 책임은 대책 없이 저를 사퇴하라고 한 분들에게 있다”라고 말했다. 나름 물러나는 날짜를 불러놓았으니, 즉각 사퇴 주장은 오히려 비박계의 정치공세라는 논리를 폈다.
 

ⓒ연합뉴스11월17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 도중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즉각 사퇴할 수 없다는 청와대의 방침과 궤를 같이했다. 그렇다고 청와대만 바라보며 버티는 건 아니다. 믿는 구석이 있다. 비박계가 당장 당을 쪼개고 나갈 가능성이 낮다고 보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새누리당의 친박과 비박 그룹이 정면충돌하는 양상이다. 비박계는 11월14일 친박 지도부에 대항하는 ‘비상시국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비상시국위원회의 스펙트럼은 넓다. 김무성 전 대표, 유승민 전 원내대표, 남경필 경기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지사,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차기 대권을 노리는 이들이 전면에 나섰다. 한 정당에 두 지도부가 생긴 셈이다. 하지만 당헌·당규상 이정현 대표를 비롯한 친박 지도부를 비박계가 강제로 끌어내릴 제도적 방법은 없다. 아무리 압박을 가하더라도 친박 지도부가 버티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사이 비박계 내 리더십 문제도 불거졌다. 비상시국위원회에 이름을 올린 대권 주자 간 시각차가 그대로 노출되었다. 김무성 전 대표는 탈당과 탄핵도 불사하겠다는 견해이지만, 또 다른 중심축인 유승민 의원은 분당에 부정적이다. 대선 주자 가운데 간판 주자가 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 점을 잘 알기에 이정현 대표는 11월15일 “우리 당 대선 주자는 지지율을 다 합쳐도 10%가 안 된다. 새누리당 대권 주자라는 말도 꺼내지 말라”며 자당의 대선 주자들을 향해 ‘팩트 폭력’을 가했다. 간판 주자가 없을 뿐 아니라, 탈당 뒤 비빌 외부 터전도 마땅치 않다. 현재 새누리당 출신이 당을 나가 독자적 영역을 구축한 사례는 두 가지다. 이재오 전 의원이 만든 ‘늘푸른한국당’과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기획 중인 ‘제3지대’다. 모두 비박계가 몸을 던질 선택지는 아니다. 이 전 의원은 비박계 내에서도 반감이 크다. 정 전 의장은 새누리당보다는 안철수 의원과 힘을 모으는 데 관심이 더 많다. 정 전 의장과 안 전 대표가 비공개 회동을 한 사실이 11월18일 뒤늦게 알려지면서 ‘통합 제3지대’론이 퍼지고 있다.  

친박계의 또 다른 ‘믿는 구석’은 반기문 변수다. 올해 말 임기를 마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내년 1월 귀국해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이정현 대표가 전당대회 개최 시기를 1월21일로 못 박은 것도 반기문 대망론을 띄워 주도권을 이어가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새누리당에 실망한 보수 유권자가 곧바로 야권을 지지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친박계의 ‘버티는 힘’이다. 앞서 설명한 11월 셋째 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도 무당층은 2주째 32%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친박계가 바라는 대로 정국이 흘러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당장 반기문 사무총장의 선택을 예측하기 어렵다. 두 달 전만 해도 친박계는 반 사무총장에게 유용한 정치 기반이었다. 지역(TK), 정치 성향(보수층)이라는 확고한 기반에 중립 성향의 표를 끌어오는 것만으로도 대선에서 파괴력이 강할 것으로 여겨졌다. 최순실 게이트로 상황이 변했고, 반 총장에게 친박은 오히려 족쇄가 되었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반 총장이 친박 기반을 이용해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친박은 곧바로 죽을 운명이다. 친박이 정권 언저리에 있다는 것은 반 총장에게도 부담이다. 이런 운명을 친박 역시 모를 리가 없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11월17일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오른쪽)와 새누리당 예비 대선 주자들이 한 음식점에 모였다.

반 사무총장을 대선까지 끌어올리려던 친박계의 실무 계획도 무너졌다. 당초 이정현 대표의 계획은 이른바 킹메이커였다. 국회 보좌진들을 중심으로 ‘친박-반기문 캠프’를 구축해놓고 연착륙시킨다는 시나리오였다. 새누리당 한 관계자는 “이정현 대표 측근이 반기문 대선 캠프를 미리 꾸리려 했고, 사람을 한참 모았다. 여러 의원실 보좌진이 제안을 받았지만, 결국 젊은 보좌진들이 고사하면서 사람을 모으는 데 실패했다”라고 말했다.

야당의 잦은 실책을 기대하며 버티기 모드

그럼에도 시간은 친박계에 유리하다. 한 새누리당 관계자는 “야당도 딜레마가 존재한다. 탄핵을 하자니 시간이 걸리고, 백날 사퇴하라고 해도 대통령은 듣지 않는다. 앞뒤가 막힌 상태에서 어떤 수를 쓰든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것만 기다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슈 피로도가 쌓이길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그사이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이 10~20%라도 회복할 경우, 반격할 힘이 생긴다. 11월을 어떻게든 넘길 경우, 친박계는 자연스럽게 비박계도 내년 1월 전당대회를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비박계도 당 지도부에 입성하려면 1개월 전부터는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표상 12월 중순부터 ‘전대 체제’가 가동된다.

비박계가 현 대치 정국에서 그나마 존재감을 계속 보일 방법은 여론을 업고 친박계와 청와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당장 11월17일부터 시작된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특위’가 이런 양상을 보였다. 최순실 게이트 국조에서 여당 의원은 총 8명이 배치됐는데, 이 중 절반인 4명(이혜훈·장제원·하태경·황영철 의원)이 친박 지도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날 첫 회의에서 비박계 여당 위원들은 자료제출 의무 조항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박계 의원은 이에 반발하며 충돌했다.

친박과 비박 사이 내전 양상이지만, 내심 모두 야당의 실책을 바란다. 11월14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을 제안하자, 새누리당 관계자 가운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야당으로서 선택하지 말아야 할 수를 선택해주었다”라는 안도감이었다. 이처럼 친박이나 비박이나 여당은 야당의 잦은 실책을 ‘희망’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새누리당 폭망’을 피할 탈출구를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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