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스러운 세상이다. 하나같이 목소리 높여 자기주장만 떠든다. 넘쳐나는 말 속에서 정작 무엇이 진실인지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언어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훌륭한 도구지만, 거짓된 언어는 때로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더 혼란스럽게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훌륭한 작품을 접했을 때 ‘말이 필요 없는 명작’이란 찬사를 보내곤 한다. 그래픽노블 〈사랑의 바다〉는 문자 그대로 말이 필요 없다. 지문 한 줄, 대사 한마디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인물과 상황 묘사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어느 어촌 마을, 언덕 위 2층 집에는 키 작고 비쩍 마른 늙은 남편과 퉁퉁한 부인 부부가 살고 있다. 둘은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하곤 하지만 사랑이 넘친다. 이른 아침, 남편은 아내가 싸준 정어리 통조림 도시락을 들고 작은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떠난다. 하지만 잡히는 거라곤 피라미뿐. 설상가상 노인의 배는 ‘골드피시(GOLDFISH)’라는 엄청나게 큰 어선과 충돌하고, 골드피시의 그물에 끌려 올라간다. 노인의 작은 배가 그물에 잡힌 물고기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랑의 바다〉 윌프리드 루파노 지음, 그레고리 파나치오네 그림, 이숲 펴냄

이야기는 이제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친다. 노인은 가까스로 그물에서 탈출하지만 다음에는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다. 노인은 갈매기 한 마리를 만나 우정을 나누기도 하지만, 바하마 세관의 타락한 공무원에게 체포당했다가, 엉뚱하게 해적의 도움으로 탈출한다. 노인이 바다를 건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아내는 또 어떤가?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오지 않아 점을 치러 갔더니, 점괘가 쿠바를 가리킨다. 전 재산을 털어 쿠바행 호화 크루즈에 올랐다가 멋진 손뜨개 솜씨로 소셜 미디어 스타가 되기도 하고, 쿠바에 도착해서는 카스트로가 연설하는 단상에 다가가 긴급체포된다. 아내의 여정도 남편 못지않게 황당하고 험난하다.

언어가 사라지자 상상력이 배가되다

이야기는 온갖 우연에 기대어 이어지지만, 결코 유치하지 않다. 세상에 대한 비판과 유머라는 두 가지 코드가 이야기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바다〉는 상반되어 보이는 두 코드를 번갈아 배치하며 이야기의 리듬과 메시지를 조율한다.

노인은 바다 위에서 친구 갈매기와 함께 인간의 만행을 목격한다. 바닷속 물고기를 산더미처럼 쓸어 담는 골드피시 호, 폐유를 바다에 흘려 버리는 유조선, 인간이 버린 쓰레기로 가득 찬 바다까지. 반면 아내의 모험은 좀 더 유머에 가깝다. 아내가 찾아간 점성술사는 팬케이크를 구워 뜯어먹은 모양으로 점을 치는데 거기에 체 게바라 얼굴이 나오고, 쿠바에서 카스트로가 연설하는데 연단 위로 불쑥 나서며 광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식이다.

온갖 사건에 휘말리면서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두 사람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 결말은 오직 ‘바다’에 달렸지만, 바다는 이미 인간으로 오염되어 있다. 부부의 사랑은 세상을 이겨낼 수 있을까? 글 작가 윌프리드 루파노는 7년 넘게 이야기를 다듬었고, 그림 작가 그레고리 파나치오네는 오직 인물의 동작과 표정, 배경 묘사를 통해 이야기를 표현했다.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연출력도 돋보인다.

언어가 사라지자 오히려 그림이 주는 상상력은 배가된다. 〈사랑의 바다〉는 진실하지만 결코 요란스럽지 않은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그래픽노블이다. 이 소란스러운 세상을 잊게 하는 조용한 휴식 같다. 그렇지만 결코 현실을 지우는 판타지는 아니다. 도리어 거짓된 언어를 삭제하고 시각적 표현과 상상력으로 인간 세상의 모순을 유머러스하게 지적한다.

기자명 박성표 (월간 〈그래픽노블〉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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