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중부 도시 팔미라에 사는 압둘카림 씨(37)는 유적 부근에서 수공예품 장사를 했다. 팔미라 사막은 전쟁 전 한 해 15만명 정도가 찾던 시리아의 대표 관광지였다. 아이들 넷과 아내, 몸이 불편한 노모와 함께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벌이였다. 지난해 11월 갑자기 큰아들이 울면서 가게로 왔다. 노모와 아내가 있던 집에 통폭탄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맨손으로 콘크리트 잔해를 들춰 아내와 노모의 시신을 찾았다. 시신은 폭탄의 열기에 녹아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폭격 당시 아이들은 집밖 공터에서 놀고 있어 무사했다. 일곱 살짜리 막내아들은 끔찍한 엄마 시신을 보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압둘카림 씨 가족은 폭격 당시 입었던 옷 그대로 피란길에 올랐다. 잔해 속에서 현금과 금붙이만 찾아 주머니에 챙겼다. 목표는 터키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국경 주위에 땅을 깊이 파놓은 데다 터키 경찰이 총을 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압둘카림 씨는 미리 경찰을 매수해놓은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밤에 국경을 넘었다. 그렇게 터키 남부 도시 산리우르파 인근 마을 힐반에 도착했다. 그는 아이들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마음에 어머니와 아내의 시신조차 묻지 못하고 국경을 넘었다.

ⓒ시사IN 조남진2011년 시작된 시리아 내전으로 시리아 국민 수백만명이 폭격과 학살을 피해 인근 국가로 탈출하고 있다. 위는 터키 국경에 인접한 ‘밥알사라마’ 난민촌.
시리아 남쪽 국경을 넘으면 요르단 정부가 마련한 자타리 사막의 난민촌이 있다. 이곳에도 압둘카림과 비슷한 사연을 가진 3300여 명의 시리아 난민이 머문다. 난민촌의 아디 씨(42)는 한겨울인데도 반소매 옷을 입은 채 떨고 있었다. “비닐 쇼핑백에 대충 현금과 패물만 챙겨 나왔다. 이 사막에서는 어디 가서 옷을 살 수도 없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피란 도중 만삭의 아내를 잃었다며 “국경 도착 직전에 진통이 시작되었다. 찬 길바닥에 담요만 덮고 출산을 감행했으나 아이도 아내도 그만 죽고 말았다”라며 눈물을 떨구었다. 그와 네 자녀는 구사일생으로 요르단 국경을 넘었다.

11월 추운 바람이 사막 한가운데로 몰아쳤다. 그들이 사는 난민촌에는 그저 천막뿐이다. 추위를 가릴 난방 시설이라고는 없다. 난민 대부분은 아디처럼 낡은 반소매 셔츠와 샌들 차림이다. 목숨만 건졌을 뿐 구호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다. 요르단 정부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이들을 수용하지만 한계에 달했다. 요르단 전체 국민의 20% 규모에 달하는 난민이 유입되면서 요르단 정부의 재정 부담이 막대하게 늘어났다.

시리아 인근 국가는 난민으로 인산인해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지난 7월 기준으로 국외로 피란한 전체 시리아 난민은 480만8229명이다. 국가별로는 터키가 272만4937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레바논(103만3513명), 요르단(65만6198명), 이라크(24만9395명) 순서다. 시리아 전체 인구의 절반이 난민인 셈이다. 통폭탄과 화학무기 등 대량살상 무기에 하루에도 수백명씩 민간인이 죽어나가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Reuters2015년 8월13일 터키에서 출발한 난민들이 그리스 남부 코스 섬 해안에 도착해 고무보트에서 내리고 있다.
터키도 힘든 상황이다. 최대 난민촌이 있는 남부 도시 킬리스는 난민 인구가 현지인의 다섯 배에 달한다. 킬리스 어디를 가든 터키어보다는 아랍어가 더 많이 들린다. 시리아 난민 약 480만명 가운데 대략 270만명이 터키에 있다. 돈이 있는 난민은 시내에 집을 얻는다. 원룸에 다섯 식구가 사는 것은 보통이다. 여러 가족이 방 하나에 묵기도 한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돈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 이야기다. 대부분 모스크로 가거나 길거리에서 노숙을 한다.

시리아 북부 알레포에서 교사를 하다 피란한 레일라 씨(43)는 “일자리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다. 물가도 비싸다. 무엇보다도 터키 사람들의 냉대가 심하다”라고 말했다. 터키 남부, 시리아와의 국경 근처에 있는 가지안테프의 경찰 관계자는 “터키인과 시리아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매일 출동해야 하는 실정이다. 터키 국민은 왜 우리만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여 엄청난 세금을 쏟아붓느냐며 불만을 터뜨린다”라고 말했다. 가장 우려하는 점은 치안이다. 가지안테프 시내 4성급 호텔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사르주크 씨는 “난민 중 누가 IS인지 누가 알카에다인지 알 수가 없다. 여권조차 없고 이름도 나이도 가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라고 말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난민들은 반팔 옷

시리아 서쪽 레바논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레바논으로 간 난민 대부분은 시리아 홈스나 이들리브 지역 주민이다. 반군의 근거지여서 폭격이 극심한 곳이다. 통폭탄이 거의 매일 수십 개씩 떨어지는 홈스는 전체가 텅 빈 유령도시가 되었다. 시리아 난민촌이 있는 레바논의 베카 계곡은 겨울이 오면 그 추위가 상상을 초월한다. 난민 110만명 가운데 절반 이상은 이동식 천막이나 폐가, 벌판, 주차장에서 지낸다. 겨울에는 동사한 난민의 사연이 넘친다. 구호품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이곳 난민의 생활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레바논 정부가 이런 외진 산골짜기에 난민촌을 만든 이유는 시리아와 레바논의 역사가 설명한다. 원래 두 나라는 사이가 좋지 못하다. 레바논은 1975~1990년 종파 간 참혹한 내전을 겪었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 탓이다. 레바논 사람들은 시리아가 헤즈볼라로 유명한 레바논 시아파를 지원한다고 의심해왔다. 레바논의 총리를 지낸 라픽 하리리가 2005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차량폭탄 테러로 암살되었는데, 이 암살의 배후에 시리아 정보기관이 깊숙이 개입한 흔적이 있었다. 레바논인은 크든 작든 테러의 뒤에는 시리아 정부가 있다고 믿는다. 이처럼 비극적으로 희생된 하리리 총리의 둘째 아들이 현재 레바논 총리 사드 하리리다.

시리아 때문에 터키에도 전운이 감돈다. 2012년 6월22일 시리아 인근 지중해 상공을 비행하던 터키 전투기가 시리아군에 격추되었다. 이때만 해도 터키는 외교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내심은 얼마 못 가 바닥이 났다. 그해 10월3일 시리아와의 접경 지역인 터키의 작은 마을 악차칼레에 시리아군의 박격포 포탄이 떨어져 주민 5명이 사망했다. 시리아 내전 기간 여러 차례 터키 영토에 시리아의 포탄이 떨어지긴 했어도 무고한 시민이 죽은 적은 없었다. 터키군은 즉각 무력 보복을 했다.

시리아 난민은 이라크에서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바그다드 알만수르에 사는 알리 함다니 씨(56)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시리아 다마스쿠스 친구 집으로 피란을 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리아 친구 일가가 이라크 바그다드의 함다니 씨 집으로 피란을 왔다. 함다니 씨는 시리아에서 겨우 몇 달 묵었지만 친구는 2년 넘게 그의 집에 살고 있다. 그는 “2년간 우리 가족도 친구 가족과 부대끼며 사느라 고생이 많았다. 더 이상 참고 같이 살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겨울이 다가오면 친구 가족이 어디로 가야 할지 대책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 이라크에는 난민촌조차 없다. 이라크 정부가 피란처를 만들었지만 시리아 인근 국가 중 가장 시설이 열악하다. 이라크 전쟁 때 시리아가 이라크 난민을 대거 수용했기 때문에 시리아 난민은 이라크 정부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말한다. 이라크 정부는 알카에다 세력이나 IS가 시리아에서 조직을 키워 이라크로 다시 유입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래서 난민에게 야박할 수밖에 없다.

시리아 난민이 찾은 또 다른 길은 유럽행이다. 주요 루트는 터키 서부 이즈미르와 보드룸이다. 특히 보드룸은 터키 해변에서 그리스 코스 섬까지 고작 5㎞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날씨가 좋으면 육안으로도 코스 섬을 볼 수 있다. 매일 밤 시리아 난민은 보드룸에서 목숨을 건 항해를 시작한다. 보드룸에서만 브로커 수십명이 활동한다. 취재 중 필자는 난민을 가장해 브로커와 접촉했다. SNS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자 “6m 보트는 850유로, 9m 보트는 1200유로, 고속 요트는 1600유로이며 어린이가 있는 가족이 제일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배는 방 2개와 거실이 딸린 요트로 2200유로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스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 바다는 수많은 난민을 삼켰다. 정원 초과와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보트가 수시로 뒤집힌다. 바닷길은 잠잠해 보여도 파도가 거세다. 그러다 지난해 9월 세상 사람 모두가 보았다시피 비극이 발생했다. 바로 아일란 쿠르디라는 세 살배기 아이의 죽음이었다. 터키 보드룸 해안가에서 빨간 셔츠를 입고 해변에 엎드린 채 발견된 아일란의 사진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 사건도 난민에게 딱히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지금도 익사체는 끊임없이 떠오른다.

100여 개국 IS 전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연일 IS 지도자들이 공습으로 사망했다. 외국인 전사 마을이나 훈련캠프도 집중 공격을 받았다. IS는 공군이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살아남은 IS의 주요 인사들은 대거 리비아로 이동했다. 그들이 새로운 근거지로 택한 곳은 리비아 전 대통령 카다피가 생을 마친 그의 고향 시르테이다. 외국인 전사들은 터키로 갔다. 그런 까닭에 터키 치안이 엄청나게 나빠졌다. 수도 앙카라에서부터 이스탄불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테러가 발생했다. 급기야 터키의 관문인 아타튀르크 국제공항까지 공격당했다.

IS 전사의 귀국도 줄을 이었다. 그들은 일단 터키로 나와서 다른 난민과 같은 루트로 움직이거나 여권을 위조해 각자 고국으로 향한다. 이들의 귀국은 또 다른 위협이다. IS에서 짧게나마 배운 테러와 전투 기술을 조국에 돌아간 뒤 사용할 수 있다. 이들은 납치나 살해 등 잔혹행위를 학습했으며 각종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들을 적발하기도 쉽지 않다. 위조 여권을 갖고 있거나 난민과 섞여 있기 때문이다. 누가 얼마나 오랫동안 시리아에 머물렀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시리아에서 IS의 활동을 감시하는 단체 ‘라카는 조용히 학살당하고 있다(Raqqa is Being Slaughtered Silently)’의 한 조직원은 “그들은 위험하다”라고 현지에서 경고했다. 100여 개국에서 몰려왔던 IS 외국인 전사들이 바이러스처럼 퍼져간다.

기자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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